청춘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본문
에세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가는, 소설로서 말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가의 에세이를 전혀 읽지 않는다거나 좋게 읽은 에세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신경숙의 <아름다운 그늘>이나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내가 얼마나 즐겁게 읽었던가. <먼 북소리>를 통해서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소설가들의 에세이에는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선택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마루야마 겐지라면 내가 하루키보다 (열 여덟 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곱배쯤 더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에세이 역시 하루키의 것보다 일곱배 마음에 드는 것으로 써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읽는 동안 이 책은 최악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의 에세이를 향해 그런 평을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다소 괴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 그 평을 거둬들이지 못한다. 최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드는 소설을 써내는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에 드는 생각을 가지란 법도 없고 마음에 드는 에세이를 써내란 법도 역시 없는 모양이다.
겐지가, '여성스로운'이나 '여자 같은'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존재를 묘사할 때만 쓰고 있다거나 동시대의 많은 소설가들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거나 하는 것은 별로상관이 없다. 그런 것은 조금 불쾌하긴 해도 불쾌함 이상의 기분을 주지는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겐지가 자신의 각오나 생각을 밝히기 위하여 똑같은 이야기를 지겹도록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설득이나 납득은 여러 번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러 번 이야기한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겐지는 소설이 아닌 그 외의 것으로 돈을 버는 작가들을 경멸하면서도, 자신 역시 이런 것을 써서 나같은 독자로 하여금 돈을 내고 이 책을 사게끔 했고 소설쓰기 이외의 것으로 유명해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한 번이건 두 번이건 간에) 자신도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하여 나로 하여금 결국은 당신도 똑같은 작자인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겐지의 소설이 뛰어난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한 문제다. 얼마간은 고고한 척 할 수 있겠지만 자신도 결국 똑같은 종족임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본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본 것은 그런 것이다.
소설 이외의 글도 맛있게 써내는 소설가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겐지의 글만은, 소설만 읽고 싶다. 앞으로는 그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