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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이

앤 패디먼, 서재 결혼 시키기

dancingufo 2006. 11. 23. 12:57
 

앤 패디먼은 작가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책으로 뒤덮힌 집에서 가족끼리 함께 모여 단어 맞추기 게임을 하면서 자랐다. 레스토랑으로 외식이라도 하러 나가면 온 가족이 모두 메뉴판에 고개를 파묻은 채 오탈자를 찾아내는 데 정신을 잃곤 했다고 한다. 그런 앤 패디먼은 자라는 동안 책과 멀어지기는커녕 책을 통하여 결혼까지 했으며, 앤 패디먼이 꾸민 집은 집이라기보다도 점점 더 책방 같은 곳으로 변해갔다. 남편 역시 마흔 두 번째 생일 선물로 헌 책방에서 9kg에 달하는 책을 사줄 만큼 감각있는 남자로 선택한 앤 패디먼은, 책과 바른 철자와 바른 문장에 (어쩌면 집착일지도 모를) 애착을 가지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혼한 지 5년 만에, 자신과 남편의 책을 섞는 것이 옳다고 결정한 후 두 사람의 서재를 결혼시키는 것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사실 재미나 감동이나 뭐 그런 것을 생각했을 때 엄지 손가락을 두 세번씩 치켜들 만큼의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 나는 이 책이 매우 즐겁고 또 즐거워 책을 손에 잡기 시작한 후 얼마되지 않아 마지막 책장까지 후루룩 해치워버렸다. 그러니까 이 책을 빠른 속도로 집어삼킨 것이다. 그 후에는 다행히 과식의 불쾌함보다는 양질의 맛나는 음식을 먹은 후에 느껴지는 적당한 포만감과 달콤함이 남았다.

나는 오탈자나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문장 같은 것에 대한 나의 심한 불쾌감이 어떤 연유로 하여 이토록 뿌리깊게 내 속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책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독서광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다. (물론 내 어머니는 네 아이를 키우는 동시에 직장까지 가지고 계셨으면서도 불구하고 책을 사 읽기를 좋아하셨고, 큰 언니는 태백산맥이나 아리랑같은 길고 긴 소설을 사들고 와 두 여동생이 그런 책들을 자연스럽게 손에 잡을 수 있게 해준 장본이었다. 작은 언니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시절부터 대학을 중퇴할 때까지 교과서라고는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을 게 거의 99% 확실한 사람인데도 소설책 만큼은 나보다 더 많이 탐독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독서가라고는 자칭할 수 있을지 모르나 차마 부끄러워 독서광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내 기준에서 보았을 때도 내 가족들의 독서량은 형편없는 수준이 되었으며 그들의 집에 있는 책장에 마지막으로 꽂힌 책은 벌써 몇년 전에 사들인 소설책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절대로 책으로 뒤덮힌 집에서 자라지 못했고, 가족들과 함께 독서 퀴즈나 단어 맞추기 게임을 한 적도 없다. 내 가족들은 보통의 한국인들에 비해 비교적 올바른 맞춤법을 구사하긴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처럼 오탈자에 대해 심각한 불쾌함을 가지고 있진 않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내게 보낸 편지의 어딘가에 '너에게 편지를 보내려니 국어 선생님한테 검사받는 것 같아서 어쩐지 긴장이 돼.' 따위의 구절이 적혀있는 걸 보면, 언니들은 나를 이해해주기 보다는 학교에서 역시 무척 잘난 체 하는 여동생이었다면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들은 앤 패디먼의 가족과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렇게 오탈자나 엉망으로 씌어진 문장들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으로 자라난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에 비해 앤 패디먼이 그러한 기질을 가지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로 느껴진다.) 하여 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앤 패디먼이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앤 패디먼이, 또는 앤 패디먼의 그러한 집안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어린 시절부터 바른 철자나 잘 씌어진 문장에 대해서 생각하며 자랐다면, 내가 조금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누군가 이끌어 주었다면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올바른 맞춤법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두고 두고 나 자신이 아쉬워 할, 내 부모들의 실수이다.

여자가 작고 귀엽게 들리는 말에 민감하며 자신이 좀 더 당당한 이미지를 가지길 바라며 똑똑한 운동 선수를 이상형으로 가진 앤 패디먼은, 귀여움이나 애교같은 걸 나쁘다고 생각하고 지적인 세포가 삽입되지 않은 근육질의 몸은 관상용으로나 즐길 법하다고 생각하는 나와 얼마쯤 닮은 데가 있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정신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기 보다는 같이 집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애인을 원하고, 내 생일에 반짝거리는 보석보다는 책장 한 줄을 채워넣을 수 있는 책을 사가지고 오는 (앤 패디먼의 남편과 같은) 남편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여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조금 더 책에 대해 애정을 가질 것을, 책속에 씌어있는 문장에 조금 더 집중할 것을, 지금보다 조금씩 더 열심히 책과 만날 것을 다짐하고- 조금 더 바른 문장을 구사할 것을, 단어에 조금 더 박식해질 것을, 올바르지 못한 단어와 문장에 조금 더 엄격해질 것을 다짐했다. 그러니까 취미생활 주제에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 따위 만드는 것, 비단 축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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