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신경숙, 리진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신경숙, 리진

dancingufo 2007. 8. 16. 19:35


열 여덟살이나, 열 아홉살 때의 일일 것이다. 작은 언니가 엄마의 생일 선물로 신경숙의 <외딴 방>을 사왔다. 그 책을 엄마가 읽고, 언니들이 읽고, 그리고 내 책장에서 더는 읽을 책이 없어진 내가 읽었다. 신경숙이라는 작가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었고, 사실 그런 소설에도 별다른 취미가 없던 나는, 그 때 그 <외딴 방>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이계를 만났다.

지금도 자신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책 때문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신경숙을 알기 이전의 나는 글쓰기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진 않았다. 그것이 나의 업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거나 희망하거나 좌절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런 채로 살았더라면, 수학자가 되고 싶다거나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식의 꿈을 가진 채로 살았더라면 나는 조금 더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신경숙을 만났을 때 이계를 알아버렸다. 그전까지 내가 살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도 전혀 다른 세계 말이다.

책을 손에 든 그 자리에서 깊은 새벽에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외딴 방>을 읽던 나는 어느 순간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냥 책을 덮었다. 옆에는 잠든 언니가 있었고, 불은 이미 꺼져서 방안은 어두웠고, 그래서 나는 켜놓았던 스탠드를 끄면서, 방금까지 손에 들고 있던 <외딴 방>을 가슴에 안았다. 마음이 아파서, 너무나도 아파서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그 새벽, 그 책을 가슴에 품은 채로 잠이 들었고 그리고 그 잠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지독한 소설광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숱한, 신경숙의 책들을 만났다. 스물 네살에 쓴 작품이라고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깊은 슬픔>이나 신경숙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외듯이 읽었던 <아름다운 그늘>. 전설처럼, 신화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기차는 7시에 떠나네>나, 하얀 소녀의 가슴팍에 짓이겨진 딸기의 붉은 물을 잊을 수 없는 <딸기밭>같은 책들. 나는 신경숙이 써낸 모든 글들을 읽었고, 그리고 그 모든 글들을 사랑했다. 신경숙은 나로 하여금 글의 힘을 믿게 만든 첫번째 사람이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말을 믿듯이 신경숙의 책에 적힌 모든 말을 믿었다. 그 당시 나는 진실로, 진실로 그에게 반해 있었다. 세상에 오로지 그의 작품만이 진정한 예술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이계를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그 이계는 너무나 예민하고 예민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열 아홉이 되기 이전의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오고 싶어졌고, 더이상은 낡고 초라하고 희미한 것들을 보지 않은 채로 살고 싶어졌다. 신경숙의 세계에서 내가 만난 것들은 그가 그토록 못 견뎌했던 '삶의 기미'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미의 흔적들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가 오랫동안 새 작품을 써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쉽게 그로부터 벗어났다. 책장에는 여전히 그의 작품들이 놓여있지만, 나는 더 이상 이미 읽은 그의 책을 다시 꺼내 읽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다른 책, 다른 느낌을 주거나 다른 세계에서 씌어진 숱한 다른 책들을 읽었고 세상에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신경숙 외에도 아주 많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보다 훨씬 더 유쾌하거나 즐겁거나 가볍거나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더는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하지 않는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완벽하게 이계에서 벗어났다. 아니, 벗어났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습관처럼 들리던 인터넷 서점에서 그의 새로운 책을 만났다. 나는 아이보리색 표지를, 리진이라는 검은 두 글자가 씌어진 책의 앞면을, 신경숙 장편소설이라는 일곱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잊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한 첫사랑이 있었다. 그 첫사랑을 교정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처럼, 그가 나를 외면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나는 조금 두근거렸고 그리고 조금 마음이 아팠다.

신경숙은 직시하기 힘든 과거를 직시할 줄 아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 과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만, 고통을 참고 결국은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고야 만다.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과거를 극복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꼭꼭 닫아 두었던 열 일곱의 그 외딴 방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방에 웅크린 채 죽어갔던 이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그 방에 고여있던 냄새를 문 밖으로 흩어보낸 후에야 그 시간들을 극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신경숙은 그 행위를 되풀이한다. 우리 역사가 간직한 아픈 시간. 그 시간들을 똑바로 우리의 눈앞에 내놓으면서 우리 모두가 그것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직시한 후에야 제대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 극복한 후에야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니까.

<리진>은 단순히 아름다웠고 특별한 개인사를 간직한 한 궁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 궁녀가 살던 시절, 우리에게 슬픔이나 고통이나 치욕을 안겨주었던 시절,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제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상대에게 칼날을 겨누었을 시절. 그 시절의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알지 못하던 나는 그래서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늘 혼란스럽게만 들렸다. 하지만 신경숙은 나에게 시비를 가리게 하는 대신, 그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애도하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아픈 시절을 살아야 했던 그들에 대하여. 종래에는 스스로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갔을 그들에 대하여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신경숙은 여전히 나로 하여금 글의 힘을 믿도록 만들었다. 나는 또다시 아침이 밝을 때에야 리진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내가 여전히 그의 글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를 앎으로 인해 아주 많은 책들을 만났지만, 그의 책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책은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바이올렛> 이후로 6년. 긴 시간이었지만, 그를 잊지 않고 그의 글에 대한 사랑도 잊지 않을 만큼의 시간은 되었다. 다음 작품이 나오기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한 소설에 대한 내 사랑이 끝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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