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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열하광인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김탁환, 열하광인

dancingufo 2008. 2. 7. 21:07


<방각본 살인 사건> 이후에, <열녀문의 비밀> 이후에, 백탑파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은 김탁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무엇이 소재가 되든, 어떤 장소나 어떤 시간이 배경이 되든, 김탁환은 분명히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아주 우아하게 풀어나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서 이런 믿음을 받는 작가들은 늘 그러하듯이, 김탁환 역시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백탑파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열하광인>은 앞의 두 이야기보다 더 많은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까다롭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이야기보다 한 단계 위의 찬사를 받아도 좋을 만큼 훌륭한 이야기였다.

백탑파라는 것은 조선 영/정조 시대에 백탑 아래서 학문을 논하던 서생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 서얼이라는 신분의 제한을 받아야만 했던 박제가, 책에 미친 바보로 유명했던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이 이에 속했다. 김탁환은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방각본 살인 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이라는 세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명방만은 백탑파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가상 인물이다. (이명방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백탑파 시리즈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봐도 좋을 김진 역시 가상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이명방은 종친인 동시에 의금부 도사이다. 백탑파 시리즈는 이러한 이명방이 살인 사건을 풀어 나가는 과정을 다룬 추리 소설이다. 

처음 <방각본 살인 사건>이 시작될 때 스무살이었던 이명방은 <열하광인>에서 어느 새 삼십대 중반의 노련한 의금부 도사가 되어 있다.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조 또한 조금씩 변화를 겪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백탑파 서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정조가 문제 삼은 것은 백탑파 서생들의 문체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점이었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금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열하광인>은 이러한 정조의 문체 반정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다.

백탑파 시리즈는 첫번째 이야기에서부터 '역사 추리 소설'로 불리어졌지만, '역사 추리 소설'로서의 진정한 면모는 세 번째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전체적으로 첫번째와 두번째 이야기보다 재미가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번째 이야기를 특별히 좋아한 이유다. 김탁환은 이 세번째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첫번째와 두번째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나 역시 이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 앞의 두 이야기를 읽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좋아하는 것은 김탁환의 단정하며 기품 있는 문체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었으며,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여섯 권의 책을 써내는 동안에도 그 훌륭한 점들을 하나도 잃지 않은 김탁환에겐  정말로 박수를 쳐주고 싶다. 재미있게 읽은 책도 많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작가도 많았지만, 누군가의 신작을 기다려본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명방을, 그리고 참 좋아했던 김진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지만 이야기를 여기까지 끌어온 것만도 엄청나게 수고스러운 일일이었을 테니 왜 다음 이야기도 만들면 안 되느냐는 투정은 못하겠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명방과 김진을, 다시 한번 더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이들을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배우가 연기하게 된다 하더라도 큰 불평은 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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