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닉 혼비, 하이 피델리티. 본문
닉 혼비를 20대 후반에(어쩌면 중반이었던 것도 같지만, 어쨌든.) 알게 된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굉장히 우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10대 후반이나, 극도로 냉소적이었던 20대 초반에 닉 혼비를 만나 이 사람의 책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운을 겪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란 말이다.
사실 내게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많지 않다. (로브처럼 나도 좋아하는 작가 Best 5, 이런 걸 적어볼까 생각 했는데 ‘좋아하는 작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가 존중하는 동시에 좋아하며 그 두 가지 감정을 꾸준히 가지고 있는 작가가 신경숙 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는 포기했다.) 도스토예프스키라든가 마르시아 가르케스, 황선미나 은희경, 알랭 드 보통이나 김규항의 책들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일고 그리하여 웬만하면 그들의 책을 사서 보는 편이지만, 내가 이 작가들의 ‘팬’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있게 말하건대, 나는 신경숙의 팬이다. 그리고, 음음음- 그리고 그 다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뒤에 한 사람의 이름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이 다름아닌 닉 혼비다.
나는 <피버 피치>를 통해 닉 혼비를 알게 되었는데, <피버 피치>는 특정한 축구팀의 팬임을 자처하는 사람에겐 성경과도 같은 책이므로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당연히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닉 혼비가 가진 훌륭함의 전부였다면, <피버 피치>가 아무리 나의 심금(!)을 울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사람의 팬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닉 혼비의 팬이 된 것은 이 사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무언가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닉 혼비의 글솜씨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에 만족했으며, 개인적으로 닉 혼비의 글이 참신하거나 유쾌하다고 느낀 데다가, 이 사람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계속해서 웃음이 났기 때문이다. (물론, 웃겨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고작 다섯 편의 글을 읽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난 그 동안 닉 혼비에게 단 한 번도 실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닉 혼비는 늘 나를 만족시켰다는 말이다. 아무리 내 마음에 드는 작가라도 모든 작품에서 나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물론 신경숙은 그랬다. 그렇다고 그 만족도가 늘 같았던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제는 닉 혼비도 그 대열에 합류했으니, 나는 닉 혼비의 팬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팝송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한 탓에 로브가 어떤 타입의 음악을 높게 평가하고, 어떤 타입의 음악을 용서하지 못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하나의 아쉬운 점. 하여 <하이 피델리티>는 나를 너무나 자주 웃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버 피치>에는 한참 못 미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팝송 매니아인 어떤 독자에게는 이것 만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소설도 드물지 모르겠다.
모든 소설의 주인공은 멋있거나 훌륭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소설의 문체가 고상하고 품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아니라면 큰 망설임 없이 <하이 피델리티>를 읽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결론을 말하자면 닉 혼비 덕분에 오랜만에 읽는 행위가 쓰는 행위 만큼 의미있고 가치있으며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고맙다. 닉 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