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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성, 당신과는 아름답게 이별하고 싶었습니다

dancingufo 2012. 3. 15. 09:11




2012시즌이 시작되었다. 내가 대전 시티즌을 좋아하게 된 이후, 열두 번째 맞는 시즌이다. 어떤 시즌에는 홈경기 100%의 출석률을 보이며 부지런히 경기를 보러 다녔고, 또 어떤 시즌에는 내 바쁜 일상에 치여 한 달에 한두 번 축구장을 찾은 것이 전부였지만. 어쨌든 그 모든 시즌의 개막전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새로운 시즌의 일정이 발표되면 그 중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경기를 하나하나 체크해 다이어리에 적어두고는 했다. 그렇게 적어둔 날에 갑작스레 지인의 결혼식이라든가 가족 행사라든가 하는 다른 일이 잡히면 어떻게든 그 일에서 빠져나와 축구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고민하며 살았다. 열두 번의 시즌을 지내는 동안, 나에게 주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축구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주말 중에서 가장 간절하게 기다린 주말을 꼽으라고 하면 역시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는, 개막전이 있는 주말일 터였다.

 

그런데 올해는 개막전이 펼쳐지는 날에도, 나는 축구장을 찾지 않았다. 홈 개막전이 있던 지난 일요일에도 그저 집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홈경기를 보러 가려면 서울에서 대전까지 가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런 수고를 성가시게 느낀 적이 없었다. 대전행 버스를 타는 일은 늘 즐거운 것이었다. 비록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는 종종 피로나 허탈함을 동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대전으로 내려가는 길만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리고 그 즐거움 속에서 나는 대전 시티즌에 대한 내 미련한 애정을 깨닫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도무지 대전으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날이 좋은 오후가 되면, 퍼플 아레나의 잔디 냄새가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마음은 요지부동이어서 나는 누구에게도 ‘축구 보러 가자!’라고 말하지 못한다. 대신 심심하게 주말을 보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텔레비전을 틀면 웬일인지 TV에서 대전 시티즌의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내 팀을 보고도 나는 반가운 생각보다도 낯설고 서운한 생각이 먼저 든다. 얼핏 보아도 우리의 골대 앞에 선 사람은 지난 열두 번의 시즌 동안 줄기차게 보아오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금세 또 마음이 서늘해진다.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슬픈 것은 아니다. 그저, 어째서 우리에게는 늘 이런 식의 이별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 서글퍼진다. 

 

사실 처음 최은성의 은퇴 소식을 접했을 때, ‘그럴 줄 알았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팀에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을 때, 그 감독이 최은성과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새롭게 부임한 감독이 선수단을 장악하기 위해서 팀의 오래된 선수를 내치는 것은 일종의 관례와도 같으니까. 만약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전은 지난 시즌이 끝나자 이런저런 방법으로 선수단 규모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듯했으니까. 그래, 또 그런 것 역시 이유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 최은성은 마흔둘이고 팀에서 버려지지 않은 거의 유일한 old man이니까. 그러니까 올 시즌쯤에는 정말로 대전이 최은성을 내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내가 어떻게 막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장철우가 방출 당했을 때, 이창엽이나 강정훈이 버려졌을 때, 나는 정말로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같이 느꼈다. 김은중이나 이관우를 보내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쪽의 고통이 더 큰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원해서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남고자 하는 그들을 우리가 버리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도 또 새로운 시즌이 오고, 그 시즌 속에서 몇 번의 승리에 들떠 그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동안, 나는 단 한 가지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니까 부디 최은성만은 아름답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부디 최은성과는 멋지게 헤어질 수 있기를 바랐고, 누구도 최은성이 더는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해서 이 선수에게 잔인하게 굴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전 시티즌의 팬으로 사는 동안, 내가 꾸는 꿈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만 남았고 결국 그 꿈도 이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몇 번의 이별들이 생각이 난다. 첫 번째 헤어짐은 김은중을 보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김은중을 두고 팀을 버렸다느니 배신자라느니 말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 김은중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럼에도 버릴 수 없던 것은 끝까지 김은중이 ‘우리 선수’라고 믿고 싶어하는 내 고집이었다. 나는 김은중이 언젠가는 우리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사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하지만 그 후로 10년의 시간이 흘렀고 김은중은 여전히 우리 선수가 아니며, 대전 시티즌이 노장 선수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알고 있는 이상 더는 그가 다시 대전에 돌아와 멋지게 은퇴해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할 수 없어졌다.

 

다음은 장철우와 이창엽을 보내는 것이었다. 대전 시티즌은 팀의 창단 멤버였던 장철우를, 2006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방출시켜 버렸다. 같은 해 역시 팀의 창단 멤버였던 이창엽은 그해 창단된 경남FC로 이적시켰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해 대전이 경남 원정 경기를 떠났을 때, 이창엽이 퍼플 크루의 응원석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지내시냐는 어느 팬의 물음에, 이창엽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이창엽은 대전을 잊어버리지 않았고, 돌아오고 싶어했으며, 결국 돌아왔다. 현재 이창엽은 대전 시티즌의 유소년 축구팀의 감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창엽을 잃어버리던 때의 허탈함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그때쯤 대전 시티즌이 어떤 방식으로 선수들과 헤어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다. 아쉽더라도 떠나는 선수를 탓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들이 남는다면 결국 팀이 그들을 버릴 거란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리고 2006년에, 이관우를 잃었다. 김은중의 선택은 존중했지만, 이관우의 선택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관우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관우가 대전 시티즌에 남았다 해도 결국은 팀이 그를 버렸을 거란 걸 아는 이상, 떠나겠다는 그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관우는 우리를 떠나 수원 삼성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첫 번째 펼쳐진 경기에서 그랑블루에게 경례를 해보였다. 그때 나는 하필이면 빅 버드의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경례를 한 후, 그랑블루에게서 환호를 받는 이관우를 보면서, 나는 이것이 축구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 것이 축구였다. 가장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든 잃어야만 했고, 그러니까 더는 그 어떤 이별에도 슬퍼하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2007년, 새로운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의 기둥이었던 강정훈이 버려지는 걸 보았을 때 나는 또 슬퍼했고, 그리고 2012년, 이렇게 최은성을 잃는 지금도 또 다시, 슬프다.

 

 

 

 

이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방식의 이별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최은성은, 몇 배의 연봉을 주겠다는 다른 팀들의 제의를 모두 물리치고 마지막까지 대전 시티즌에 남았던 선수다.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 팀을 떠날 수 있었는데, 보잘 것 없는 이 대전 시티즌이란 팀을 누구보다 아껴주던 선수다. 그런 그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고 진심어린 인사를 하면서 헤어지고 싶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것뿐이었고 실은 최은성이 바란 것 또한 그리 많지 않았을 것만 같다.
 
클럽이, 최은성에게, 너무 많은 연봉을 요구했다고, 말바꿈을 했다고, 자기들은 최선을 다했다면서 최은성이 나쁘다고 말한다. 물론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최은성이 그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삶의 흔적을 믿는다. 내가 믿는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이다.

 

최은성이 대전 시티즌을 지켜왔던 지난 15년의 시간을 믿는다. 대전 시티즌의 엠블럼이 새겨진 그의 왼쪽 팔뚝을 믿으며, 2011년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팬들 앞에서 흘리던 그의 눈물을 믿는다. 

 

 

 

 

대전 시티즌의 팬으로 열두 번째 시즌을 맞았다. 가끔은 기쁠 때도 있었지만, 슬프고 화가 날 때가 더 많았다. 때로는 축구를 좋아할 거였다면 대전 시티즌을 좋아하지는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대전 티시즌의 팬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일이 뭐가 그리 많았겠는가.

 

우리가 기업팀이 아니라는 것. 그게 조금 좋았다. 우리에게 충성도 높은 팬들이 있다는 것. 그것도 조금 좋았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퍼플 아레나. 그 공간이 있어서 즐거웠다. 그리고, 다른 팀이 수십억의 돈을 퍼부어도 쉬이 가질 수 없는 최은성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정말로 가슴 뿌듯했다.

 

그런 최은성을 누군가가 버렸다. 적어도, 팬들이 버린 것은 아니다. 최은성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를 버렸다. 그리고 그런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이 봄, 나는 축구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방황을 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다시 퍼플 아레나로 돌아갔다. 봄이 찾아든 퍼플 아레나에 들어서면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잔디 냄새가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거지 뭐, 라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한 척 다시 퍼플 아레나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처가 오래 간다. 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정도 일로는 내게 스크래치를 남길 수 없다는 듯이, 이만한 일에 꼼짝할 내가 아니라는 듯이, 또 퍼플 아레나를 찾아가 앉아있을 수가 없다.


 

 


언젠가 대전 시티즌의 연습 경기를 보러 갔던 날의 일이다. 경기가 끝나고 저녁을 먹고 대전 시내를 한가롭게 걷고 있는데, 저만치 최은성이 가족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기장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친 것이 반가워서 괜히 얼굴을 붉히며 뒤를 따라가는데, 마주 걸어오는 대전 시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다 이 선수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를 안고 있었던가. 아니면, 아이의 한쪽 손을 잡은 채 부인과 나란히 걷고 있었던가. 어쨌든 유유자적 저녁 산책을 즐기던 최은성은 인사를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하는데 나까지 인사를 해서 무엇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돌아서면서도, 최은성이란 존재가 대전에서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팀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뛴 선수, 언제나 골문 앞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캡틴, 최은성은 그런 식의 모든 의미들을 넘어서는 존재 같았다. 그냥 대전 시티즌이, 대전의 그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최은성도 계속해서 대전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였고, 그래서 그 모습에 나는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이제 더는 대전과 최은성을 함께 생각할 때, 마냥 흐뭇한 미소 같은 건 지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리울 것이다. 정말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지냈다. 최윤겸 감독이, 김은중과 이관우가, 배기종이, 강정훈과 장철우가, 김정수가, 이창엽이, 공오균과 장현규가, 김창수와 주승진이, 우리들의 데닐손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 모든 그리움과 다른 방식으로, 최은성이 그리울 것이다. 미안할 것이고, 아플 것이다. 그 모든 노고와, 정성과, 한없이 오래 된 듯하지만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그 긴 시간과, 진심어린 마음으로 우리들을 향해 웃어주었던 그 애정에, 고작 이렇게밖에 답하지 못하는 현실이 아프다. 하지만 그래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대전 시티즌의 팬들이 가장 사랑한 것은 최은성이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선수들을 사랑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한 것은 최은성일 것이다. 이제와서 그 사실이 뭔가를 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으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대전 시티즌의 골문을 보면 최은성이 생각날 것이다. 비록 이번에도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난 시간들만은 우리들에게도 최은성에게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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