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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규라는 선수가 있었다

dancingufo 2012. 9. 17. 12:03

 

장현규라는 선수가 있었다. 2004년 봄, 갓 대학을 졸업한 후 대전 시티즌에 입단한 선수였다. 처음에는 누구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데뷔 후 채 반 년이 지나기도 전에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선수였다. 언제나 가난하여 쉬이 좋은 신인선수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젊고 튼튼하고 부지런한 이 선수의 플레이에 자주 감탄했다. 그때 장현규는 우리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다른 팀의 팬들은 장현규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아무리 입을 모아 이 선수를 칭찬해도,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고, 그래 봤자 꼴찌 팀의 수비수 아니냐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반응들을 마주쳐도 서운하거나 억울하진 않았다. 그때는 장현규가 우리 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 선수의 미래를 꿈꿔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고, 실은 그 재능을 우리들만 알고 있다는 사실에 비밀스런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2004년, 그 해에 우리들은 대전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해지던 최윤겸 감독을 가지고 있었다. 장현규는 바로 그 최윤겸 감독의 첫 번째 작품이라 불린 선수였다. 자신의 애제자를 향한 감독의 사랑은 늘 흐뭇하기 그지 없어서, 장현규의 부족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조차도 최윤겸 감독의 입가에는 보기 좋은 미소가 번지곤 했다. 그 미소를 볼 때면, 감독의 선구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그렇게 비슷한 마음으로 장현규를 좋아했다.  
  
2006년 8월, 우리는 FA컵 8강전에서 리그의 최강팀인 수원을 만났다. 객관적인 전력 차는 확실했으나, 당시 수원과의 관계에는 전력 차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운이 서려 있어서 팬들은 이 경기에서만은 반드시 이기고 싶어 했다. 그런데 장현규는 하필이면 이 경기의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했고, 결국 경기가 패배로 끝나자 그라운드 위에서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 해 장현규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187cm나 되는 커다란 키의, 스물여섯 살짜리 남자가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 서 있으니 정작 이쪽에서는 울음을 터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황스런 마음으로 장현규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너희도 우리처럼 이 패배가 아픈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때문에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대신해서 울어주는 선수가 없었다면 속상한 마음을 참기 힘들었을 테니까. 장현규는 그런 선수였다. 울고 싶은 우리의 마음과 똑 같은 마음으로 그라운드 위에서 울어주던 선수였다.
 
장현규라는 선수가 있었다. 큰 키에, 마른 몸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가진 선수였다. 그래서 마냥 순해 보이긴 하지만 막상 그라운드 위에 서면 무섭도록 집요함을 보여주던 선수였다. 팀 내에서 연습경기를 할 때조차도 자신의 집요함을 숨기지 못해서 같은 팀 공격수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어떤 날은 그라운드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다가, 문득 곁에 서 있던 코치를 붙든 채로 쪼그리고 앉는 장현규를 본 적이 있었다. 무얼 하는가 싶어서 쳐다보면 장현규는 운동장 바닥에 손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수비 위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질문의 내용이 궁금해 바짝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장현규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장현규는 늘 순수하게 부지런했고, 그런 기억이 차곡 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 장현규는 대전 시티즌을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 중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선수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그런 장현규의 이름을, 2011년 승부조작 가담 선수 리스트에서 보았다. 내가 보아왔던 축구가, 실은 진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관중석에 앉아서, 패배가 속상한 내 마음보다도 패배를 견뎌내야 하는 선수들을 더 많이 걱정했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화를 내고, 억울해 하고, 축구란 게 고작 이런 거였구나- 하고 허탈해 하고 있을 때, 그 속에서 다름 아닌 장현규의 이름을 발견했다.
 
배신감보다도, 울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문득,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한 순간에도 제 쪽으로 온 공을 안전하게 처리한 다음에 쓰러지던 장현규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런 축구에 숱하게 감동 받던 시절이 있었다. 나를 늘 미소 짓게 만들었던 축구였고, 너무나 믿음직스러워서 걱정이나 염려 같은 건 끼어들 틈도 없던 축구였다. 
 
장현규를 미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했던 축구를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잃어버린 이유였다. 그런 식으로 끝내버리기엔, 장현규의 축구가 너무 훌륭했다. 사건에 연루된 선수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줄줄이 경찰서로 들어가는 모습이 TV에 나올 때면, 모른 체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장현규의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승부를 조작해서 팬들을 기만한 그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장현규를 비난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장현규는 K리그를 망친 주범이었겠지만, 나에게 장현규는 여전히 훌륭한 재능을 갖춘, 그런데 더는 그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할, 마냥 안타깝기만 한 축구선수였다.
 
때로는 장현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같은 사건에 가담했던 선수들의 비극적인 소식을 접할 때면 더욱 더 그랬다. 장현규는 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건, 이 선수가 가진 밝고 튼튼한 마음을 믿은 이유였다. 잘 이겨내 주리라 믿었고,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갑작스런 비보를 접한 건 지난 8월 16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나른한 오후에, 심심한 마음으로 SNS에 접속했다가 장현규의 사망 소식을 보았다. 처음엔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다 여전히 젊고 여전히 튼튼하리라 믿었던 장현규의 심장이 갑자기 멈춰 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 불현듯 기억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 기억은 오래 전 봄날의 것이었고, 실은 이미 오랫동안 잊고 지낸 것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퍼플 아레나로 들어서면, 겨울 한 철을 잘 넘긴 잔디에서는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 몇 달 만에 홈 경기를 본다는 설렘에 잔뜩 들뜬 마음으로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저쯤에서 그라운드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장현규의 모습이 보였다. 습관처럼 긴 소매의 끝자락을 말아 쥔 장현규는 갑작스레 자라버려서 제 키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처럼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걸음걸이를 갖고 있었다. 그 걸음으로 선수들과 줄을 맞춰 관중석을 바라보고 서면, 장현규가 입고 있는 자줏빛 유니폼이 잔디의 초록색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새삼스레 감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장현규가 여전히 우리 팀 선수라는 사실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다른 팀에서 가져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종종 불안에 떨며 지켜본 선수였다. 그 선수와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즌을 함께 맞는다는 사실이 기뻐서, 새삼 장현규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현규가 참 좋아. 장현규가 대전 시티즌 선수여서 너무 좋아!’라는 생각이 말이다.
 
그런, 장현규라는 선수가 한때 우리들에게 있었다. 함께 하는 시간 내내, 소중한 마음으로 지켜본 선수였다. 잘못된 판단이 있었고, 실수나 어리석은 행동이 있었고, 그로 인한 수많은 비난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더 이상 사랑 받을 자격 같은 건 없는 축구선수로 남았을지 모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이렇게 그리운 이름으로 남아 있는 장현규라는 선수가 있었다.
 
비록 그의 축구는 갑작스레 멈춰버린 심장과 함께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에 끝나버렸지만. 장현규라는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남을 것이다. 앞으로도 아주 긴 시간 동안, 어쩌면 축구팬으로 사는 내내,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억하게 될, 장현규라는 선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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