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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축구와 사랑에 빠질까?

dancingufo 2012. 9. 28. 22:20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sntn_id=5890

 

어릴 땐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다. 집에는 남자 형제도 없었다. 정확하게는 남자 형제가 있긴 하지만 열 살이나 어린 남동생이기 때문에 학창 시절의 나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결국 여자만 다섯인 집에서 자라면서 어떻게 축구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처음에는 축구가 무척 재미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으로나마 처음 축구를 본 것은 할머니 집에 갔다가 삼촌에게 TV 채널권을 빼앗긴 이유였다. 삼촌 곁에 앉아서, 한참을 뛰어도 고작해야 두세 골 밖에 들어가지 않는 걸 무슨 재미로 보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경기를 끝까지 지켜본 것은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경기를 다 본 후에 축구란 것이 마냥 지겹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제대로 된 규칙 같은 건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골을 넣은 후 두 팔을 번쩍 들며 포효하는 서정원은 분명히 멋있었다. 이듬해 열렸던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올림픽 축구팀이 보여준 선전은 어린 나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서정원을 비롯하여 노정윤이나 신태용과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로부터 2년 후, 미국 월드컵 대회에서는 홍명보라는 선수에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구도(求道)’의 부산 출신답게, 당시까지 나를 더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축구보다도 야구였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스포츠는 야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2002년이 오고, 대한민국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그 때의 그 즐거움을 잊지 못해서 결국 K리그 경기장으로 달려가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러했다.
 
만약, 대한민국 땅에서 2002년을 겪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사건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그 해 대다수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6월 내내 축구에 열광했을 뿐이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K리그 경기장으로 달려가는 걸 택했다.
 
처음엔 특별히 어떤 팀을 좋아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굳이 고르라고 했다면 꾸준히 애정으로 지켜봐 왔던 홍명보의 소속팀을 골랐을 것이다. (당시 홍명보의 소속팀은 포항 스틸러스였다.) 그 날 내가 유성행 버스를 탄 데도 실은 대전 시티즌과 경기를 펼칠 팀이 포항 스틸러스라는 사실이 한 몫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축구는 정체성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팀이 이겨도 좋고, 저 팀이 이겨도 좋다고 생각했고, 중요한 것은 승리나 패배보다도 축구를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처음 퍼플 아레나에 도착했던 날을 기억한다. 가을이었고, 날이 아주 좋았고, 경기장 앞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경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관중석이 잔디와 너무 가까워서 조금 놀랐던 기억은 남아 있다. 잔디 냄새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상쾌하게 느껴졌던 경기장 안의 공기도. 관중석에 서 있으니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들려오던 선수들의 목소리도. 처음 퍼플 아레나를 만났던 기억 속에 함께 남겨져 있다.
 
대전 시티즌의 홈구장인 대전 월드컵 경기장의 내부 모습.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퍼플 아레나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어쩌면 조금쯤 충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축구가 그토록 나와 가까운 곳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퍼플 아레나는 그라운드와 관중석의 거리가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관중석이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시야가 좋기로 유명한 경기장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고 당시에는 그저 퍼플 아레나가 그 전까지 만났던 그 어떤 경기장보다도 특별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관중석에 있는데도, 선수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그 놀라운 현장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수들은 소리를 내며 그라운드에서 넘어지거나, 골대 앞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펼치거나, 아쉽게 빗나간 슈팅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런 모든 일들이 가감 없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한때는 축구란 것이, 90분 동안 달려보았자 고작 두세 골 밖에 들어가지 않는 지루한 경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퍼플 아레나에서 만난 축구는 90분 내내 시종일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때문에 잠시도 지루해 할 틈이 없는 진짜 스포츠였다.
 
물론 그런 나의 감탄스러운 마음과 관계 없이, 대전 시티즌은 그 날도 패배했다. 당시 대전은 21라운드가 펼쳐질 때까지 단 한 번의 승리 밖에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순위도 당연히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 날 역시, 전반전에는 선제골을 넣고 앞서갔지만 후반 들어 이동국에게 동점골을 허락했고 경기 막판에 한 골을 더 내주면서 역전패를 당했다. 또 한 번의 경기가 패배로 끝이 나자 상대팀의 간판 스타였던 이동국의 등 뒤로 거센 야유가 쏟아졌고, 대전의 간판 스트라이커였던 김은중에게도 비난의 목소리가 날아 들었다.
 
우스운 것은 내가 그 소란스런 자리에 서서, 어쩐지 이 패배가 분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경기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어느 쪽이 이겨도 무방하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경기가 끝났을 때는 그 패배가 괴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다음 주말에 다시 대전의 경기를 보러 갔고, 그 경기에서도 패하자 그 다음 경기 때 다시 대전을 찾았으며,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는 경기가 있는 주말이면 매번 대전이 경기를 하는 곳으로 찾아가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2002, 그 해 대전이 거둔 성적은 27경기 1 11 15패였다. 분명히 그 시절을 함께 보냈건만. 프로 축구팀이 어떻게 그런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까, 하고 새삼스레 놀랄 만큼 초라한 성적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성적표를 가진 팀에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서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대와 꽝, 하고 부딪혀버린 것이다. 이왕이면 그 상대가 조금 더 잘났고, 조금 더 돈이 많고, 조금 더 내 가까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택한 팀은 당시까지만 해도 매 시즌 꼴찌를 도맡아 하던, K리그 팀들 중 가장 가난한, 게다가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가야만 만날 수 있는 상대였다.
 
처음에는, 하필이면 대전 시티즌의 팬이 되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때로는 그런 나 자신을 끝없이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자발적으로 자신의 팀을 선택하는 축구팬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팀을 선택하기보다는 선택 당한다. 그렇게 갖게 된 팀이 자신의 마음에 들 수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의 팬들은 자신의 팀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대전 시티즌이 나를 얼마나 여러 번,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좌절시켰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쉽게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전 시티즌의 팬이 되었다는 것이고, 바로 그 순간부터 축구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대전 시티즌이 아니라 다른 팀의 팬이 되었다면, 수원 삼성이라거나 전북 현대의 팬이 되었다면, 그래서 우승컵을 몇 개쯤 품에 안아봤거나, 국가대표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해 보았다면 나에게 축구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전 시티즌을 통해서 축구를 만났고, 결국 내가 사랑하는 축구도 대전 시티즌의 축구가 되었다.
 
가끔 사람들은,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내가, 어째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전 시티즌을 좋아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묻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그냥 웃어버린다. 어떤 축구팀을 사랑하는 일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 웃음의 의미도 이해할 것이다. 축구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좋아할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 팀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팀의 경기를 보고 싶어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축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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