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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SK와이번스의 팬이 되고 싶다

dancingufo 2012. 10. 29. 19:05

 

 

 

 

두어 달 전, 롯데가 한창 정규리그에서 2위를 달리고 있던 때이다. 내친 김에 1위까지 넘보며 하루하루 승차 계산에 바쁜 나를 보고, 이제 갓 야구를 보기 시작한 열세 살짜리 조카가 말했다.
 
“우승하려면 2위로 올라가는 게 더 유리하대. 3위나 4위로 올라가면 경기를 너무 많이 해서 지치고, 1위로 올라가면 너무 오래 쉬어서 경기감이 떨어진다던데? ”
 
이론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어도 좋았을 테지만. 그러기엔 지난해의 기억이 너무 또렷해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우린 지난해에 2위로 올라갔지만, 한국시리즈 못 갔잖아.”
 
그리고 그런 건 다 못 믿을 거라는 듯 대답하자, 조카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것을 그렇게 단숨에 일축해버릴 줄은 예상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몇 위로 올라가는 게 유리한데?"
 
그래서 얼마간 불만스런 표정으로 되묻는 조카에게,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해주었다.
 
"그냥, 플레이오프에선, SK가 유리해."
 
그게 SK에 대한 나의 감정이었다.

 

 

 

2012년 롯데 자이언츠는 4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으나, 한국 시리즈로 올라가는 데는 또 한 번 실패했다
(사진 출처: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2008, 롯데는 7년이나 계속되었던 기나긴 암흑기를 빠져 나와 드디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로이스터 야구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이번엔 정말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는 내리 3패를 당했고, 시즌은 허탈하게 끝이 났다. 우승컵을 안고 싶었지만,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고 그것은 이듬해에도 그대로 되풀이 되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시즌을 끝냈다. 그렇게 번번이 같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자, 자연스레우리는 왜 안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에게, 우리가 우승하지 못하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만든 팀이 있다면 그게 바로 SK 와이번스였다.
 
SK를 보면, 야구를 잘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실책 없는 탄탄한 수비. 안정적인 선발진과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불펜진.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어김없이 들어맞는 작전야구와, 한두 선수가 무너져도 그에 못지않은 선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두터운 선수층. 그 모든 것들은 롯데가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SK에는 잘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았다. 밉든 곱든 우리 팀 선수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지냈지만. 가끔 탐나는 선수들이 생기면 그 선수들은 하나같이 SK 선수들이었다 (물론 지금의 SK는 그때의 SK와 똑같지 않고 롯데 역시 많이 달라졌지만, SK가 정말 야구를 잘하는 팀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SK를 플레이오프에서 만났다. 지난해에도 바로 이 자리에서 만났던 팀이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때는 우리가 2위로 올라가 4위였던 SK를 기다렸지만 이번엔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결국, 지난해보다 상황은 더 나빠진 셈이다.
 
우리는 지쳐 있는데, 그들은 힘이 남아돌았다. 우리는 쓸 선수가 없는데, 그들은 여유만만했다. 그런데도, 지난해에는 4위로 올라왔던 SK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니 이번엔 반대로 우리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처음 롯데를 좋아한 것부터가 바보 같은 짓이었다.
 
비록 1차전을 지긴 했지만, 2차전과 3차전을 연달아 이겨놓고도 롯데는 이번 해 역시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SK는 여전히 강했고, 롯데는 그 SK를 넘어서지 못했다. 물론 다섯 명의 선발 투수들 중 무려 세 명이 부상으로 빠진 채 치른 경기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경기였고, 그럼에도 두산을 꺾는 데 성공했다. 난적 SK에도 쉽게 경기를 내주지 않았고, 끈질긴 승부를 펼쳐서 5차전까지 끌고 왔다. 그러니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고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지만, 딱 한 번의 승리만 더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일찌감치 3점을 먼저 뽑아냈고, 평소처럼 집중력만 발휘한다면 충분히 지킬 수도 있는 점수였다. 그런데, 그 중요한 순간에, 쉬운 타구를 놓쳐서 한 점을 내주고, 다시 베이스 커버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아 어이없게 견제구를 빠뜨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승리나 우승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토록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또 다시 이렇게 시즌을 끝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허탈한 기분이 몰려왔다.
 
그래서 멍한 기분으로 관중석에 서 있노라면, 그라운드 위에서 프로야구 최초로 6년 연속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 쾌거를 자축하는 SK 선수들이 보였다. 그 선수들을 향해, 붉은 색 깃발을 흩날리는 SK팬들도 보였다. 승리한 후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가을마다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어떤 기분인 건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할 수만 있다면 나도 SK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SK의 팬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결국 우리가 이기게 될 거라는 자신감을 가져보고 싶었다. 중요한 순간에, 결코 이 선수들이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보고 싶었다. 한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장식해 보고 싶었고,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우승에 대한 추억을 되씹어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다시 태어나면 SK팬이 될 거라고 중얼거리는 내 말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열세 살 조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년부터 SK를 응원하면 되잖아. 경기장도 더 가깝고 경기 보기도 더 편할 텐데."
 
듣고 보면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제, 부산에서 산 시간보다 서울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진 나에게 롯데는 더 이상 연고지 팀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문학 구장은 열차나 시외버스가 아니라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곳에 있었고, SK에는 김광현이나 정근우처럼, 오래 탐을 내다 보니 어느덧 정이 든 선수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다음 해가 아니라 다음 생을 기약하는 나 자신 때문에 웃음이 났다. 아무리 오랫동안 우승을 못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실책을 하고, 압박감 때문에 실력 발휘를 못하는 타선을 지켜봐야 한다고 해도, 어쨌든 내년에 나는 또 롯데 야구를 볼 계획인 것이다. 그건 참 슬프고도 기쁜 일이다. 배신할 수 없는 팀을 가진다는 것은, 야구를 가장 재미있게,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니 말이다.
 
2012 10 22. 그렇게 또 한 번의 시즌이 끝이 났다. 이제 하루 하루 퇴근길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스코어를 보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날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겨울이 미처 다 지나가기도 전에 또 야구장에 울려 퍼지는 부산갈매기가 그리워질 것이다. 그러니 SK 와이번스의 팬이 되는 일은 다음 생으로 미루고, 다시 더 단단해져 돌아올 롯데 자이언츠를 믿으며 다가오는 새 시즌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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