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잠못 드는 밤, 걸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까지 본문

품행제로

잠못 드는 밤, 걸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까지

dancingufo 2012. 12. 5. 20:47

 

 

 

산티아고 베르나베우[i]에 처음 간 것은 2007년의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초겨울의 추위가 시작되었지만 스페인에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던 그 해 11월에, 나는 레알 마드리드의 홈 경기장에 축구를 보러 갔다. 2002, 처음 이 팀을 좋아하게 된 이후 꼭 5년 동안 주말마다 밤을 새가며 지켜본 팀이었다. 그 팀에서 뛰고 있던 슈퍼 스타들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달리고 있는 모습을 나는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경기에선 레알 마드리드가 4 3의 승리를 거두었다. 무려 일곱 골이나 터진 경기였고, 그래서 내 마음도 한껏 들뜬 채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응원가를 흥얼거리며 경기장을 나서자, 이미 어두워진 도심 한 가운데 푸른 빛을 내면서 서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보였다. 한 도시가, 커다란 축구장과, 어떻게 그토록 친근하게 어울릴 수 있는지. 나는 그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다가, 문득 머지 않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다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고, 다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만나야겠다고 말이다.
 
어둠 속에 푸른 빛을 내면서 서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보인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2010년 여름, 하릴없이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문득 다시 스페인행 비행기를 타고 싶어졌다. 별탈 없이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훌쩍 여행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그렇게 아무런 계기없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 때 나는 안달루시아 지역[ii]을 둘러본 후 포르투갈로 넘어갈 계획이었기에 도중에 다시 마드리드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중간에 마드리드로 돌아와 사흘을 머물기로 한 것은 그 즈음, 보고 싶은 경기가 있어서였다. 2010 9 11일은, 2010~2011시즌의 레알 마드리드 홈 개막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 경기를 보기 위해 하루를 텅텅 비워두었던 나는, 오후 즈음 하여 숙소가 있던 그란비아 거리에서 시벨레스 광장까지 걸어 내려갔다.
 
시벨레스 광장은 사자가 이끄는 마차 위의 시벨레스 여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우승을 하면 바로 이 광장에서 카 퍼레이드를 펼치곤 했다. 3년 전, 바로 이 광장에서 27번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까지 간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을 되짚어 버스 정류장 앞에 서니,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자신의 차를 몰고, 또는 버스를 타고, 또는 걷거나 또는 지하철을 이용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향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가득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냥 점잖게만 보이던 에스파냐의 수도가 열정적인 축구의 중심지로 변모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듯했다.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분주하다
 
 
경기장 앞에 내리면, 주변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원래도 경기가 있는 날이면 분주해지는 곳이긴 하지만, 이번엔 홈 개막전이 있는 날이라 좀 더 유난스러운 듯싶었다. 둘러보면 방송 촬영용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 팬들을 인터뷰하고 있는 사람, 유니폼에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설렘으로 새로 시작되는 시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나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리를 오가다가 곧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면, 오히려 그 안은 마냥 조용하고 한산하여 밖의 소란스러움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사실 경기가 시작되기 30분 전까지도 경기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다 경기 시작 시간이 가까워 오자, 온 좌석이 순식간에 사람들로 들어찼다. 결국 경기가 시작될 때쯤 주위를 둘러보면, 빈 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8만 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경기장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이 모두 오로지 한 곳만을 집중하고 있어서, 그 곳에서의 시간은 놀랄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아쉽게도, 전반전은 0 0으로 끝이 났다. 경기는 충분히 재미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이곳까지 왔으니 골을 좀 보여줬으면 싶었다. 하여, 얼마쯤 투덜대며 자리를 뜨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건물 밖으로 마드리드의 평화로운 저녁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드리드에 저녁이 오고 있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마드리드는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낭만적인 경기장에 서서,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다시 내려다 볼 수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경기 결과야 어찌되든 오늘밤만은 바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축구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승리에 욕심내지 않는 착한 축구팬이라서, 결국 또 한 번 승리라는 상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3분 만에, 레알 마드리드의 까르발류는 골을 넣었다. 그것이 결국 결승골이 되었고 하여 나는 홈 개막전뿐 아니라 시즌 첫 번째 승리도 지켜보게 되었다. 그 사실이 기뻐서 어깨를 들썩이며 경기장을 빠져나오면, 이미 저녁이 깊어 있었기에 다시 그란비아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내가 탄 버스가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 멈춰서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버스에서 내렸고, 때문에 덩달아 하차를 하면서도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다 눈치채게 된 것인데.
 
이 날은 마드리드에 큰 행사가 있었다. 아마도 그 행사 때문에 차량을 통제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지점부터는 차도를 온통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밤의 마드리드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아무런 불만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결국 나와 내 동행도, 우리가 내린 곳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한참을 헤매다가 찾아낸 그란비아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 사람들 속에서 거리의 이름이 새겨진 붉은 불빛이 반짝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LA GRAN VIA가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저녁 마드리드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La noche en blanco(직역하면, 백야. 그러니까 '잠 못드는 밤'이라는 뜻)가 열렸다. 이 행사가 열리는 날은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이 밝을 때까지 밤새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다녀왔던 나는, 본의 아니게 걸어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마치, 평소 버릇처럼 말해오던, 걸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갈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내 말을 누군가 몰래 듣고 일부러 그런 우연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에 서서, 나는 그 묘한 우연에 괜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깊어가는 잠 못 드는 밤을 지켜보며 문득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언제가 되든,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겠다고. 그리하여 또 한 번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고, 또 한 번 걸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이다.
 
 
--------------------------------------------------------------------------------------------------------
 
[i] 레알 마드리드 CF의 홈 경기장으로, 정식 명칭은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Estadio Santiago Bernabé u)이다.
[ii] 스페인 남쪽 끝에 있는 자치지방으로서, 수도는 세비야이다. 도시마다 특색이 강한 곳이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