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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간, 붉은 악마가 되다

dancingufo 2012. 12. 5. 20:49

 

 

2004, 나는 중국에 있었다. 이전 해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축구장을 누볐으니까.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K리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경기 결과를 확인하며 축구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결국 그 바람 때문에 살짝 심각한 향수병에 걸려 있을 무렵,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중국을 찾아왔다.
 
그 해, 중국에서는 열세 번째 아시안 컵이 열렸다. 그 대회를 보기 위해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중국의 낯선 도시까지 혼자서 버스를 타고 찾아가야 했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8강전까지의 경기를 산동성의 성도인 지난에서 치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은중이나 이동국의, 박지성이나 김남일의 경기를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세 시간이 아니라 삼십 시간쯤이라도 달려서 축구를 보러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혼자 가방을 둘러메고 지난의 한 호텔을 찾아가면, 그곳엔 이미 '붉은 악마'가 도착해 있었다. 사흘 전에 이미 지난에 와서 쿠웨이트에 4 0으로 승리를 거둔 경기를 보았던 나는, 그 날까지도 얼마쯤 승리의 기운에 들떠 있었다. 이란이라는 만만찮은 숙적과의 8강전 경기를 앞두고도 별로 긴장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나는 그저,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축구장에 간다는 사실이 기뻤고 이 경기만 이기면 그들을 따라 베이징까지 가겠다는 생각에 가슴 설레 하고 있었다.
 
그렇게 부푼 마음으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면, 아침부터 추적거리던 비는 다행히 그쳐 있었다. 그래도 물을 잔뜩 머금은 잔디가 걱정이 돼 그라운드를 내려다보고 서 있으면, 어쩐지 내가 선 자리가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붉은 악마들 속에 섞여 있느라, 실로 오랜만에 골대 뒷자리에 자리를 잡은 탓이었다. 그라운드까지의 거리도 멀었고 시야도 엉망이었기에 사실 경기를 제대로 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중국 지난에 있는 산둥 스포츠 센터스타디움
 
 
결국 경기 내용은 포기를 하고 응원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을 하는데, 문득 어디선가 자연스럽지 못한 발음으로대한민국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귀를 기울여 보면 바로 앞줄에 서있는 두 명의 여자 아이는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었다. 양 손에 작은 태극기 깃발을 하나씩 들고 시종일관 폴짝 폴짝 뛰면서 응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나보다 더 열심이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뒤를 돌아본 아이와 단박에 눈이 마주쳤다.
 
사실 당시 중국의 축구팬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대표팀을 싫어했다. 1978년부터 자그마치 26년 동안이나 중국 국가대표팀이 한국을 이기지 못한 이유였다. 그래서 생겨난, ‘공한증(恐韓症)[i]이라는 징크스 아래 한국 대표팀은 그 어떤 팀보다 미움을 받았다. (물론 중국인들이 한국팀과 일본팀 중에서는 어느 쪽을 더 싫어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몇 중국팬들은 한국 선수들을 좋아하거나, (내 앞에 서 있던 아가씨는 차두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또는 한국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기도 했지만 그런 팬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중국팬들은 한국이 이기는 건 보고 싶어하지 않는 듯했다.
 
사실 경기에서 우리가 앞서나가고 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참을 만했다. 문제는 우리가 상대에게 골을 허용했을 때 생겨났다. 경기가 시작된 지 9분 만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첫 골이 저쪽에서 터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정체를 감추고 있던 관중들이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모두 우리의 패배를 바라고 있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불운을 기뻐하며 비웃듯 이 쪽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자, 새삼 잊고 있었던 패배감이 되살아났다. 축구란 건 참 이상한 것이었다. 고작 상대에게 한 두 개의 골을 허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응원하는 나마저도 굴욕감이나 수치심 같은 것들을 느껴야 하니까 말이다.
 
물론 선수들도, 팬들도, 그렇게 쉽게 경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선제골이 들어간 직후, 설기현의 동점골이 터졌고 두 번째 골을 허용한 후에도 곧바로 이동국이 다시 동점골을 터트렸다. 세 번째 골은 우리 쪽에서 먼저 나오기도 했다. 김남일의 역전골이 들어갔을 땐, 어쩌면 우리가 난적 이란을 물리치고 베이징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 함께 소리를 높여 부르는 아리랑은 때로는 흥겨워도 또 때로는 그 만큼 구슬펐다. 후반 31, 이란의 카리미에게 네 번째 골을 허용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이기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고, 그러니 더 힘을 내자고, 계속해서 주문을 걸었지만, 실은 그 주문은 혹시나 패배해도 너무 절망하지는 말자는 스스로를 향한 위로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3 : 4의 스코어로 경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수들이 우리를 가장 즐겁게 했을 때 우리가 불렀던 바로 그 노래였다.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젊은 그대, 잠 깨어 오라. 젊은 그대, 잠 깨어 오라. - - 사랑스런 젊은 그대. - - 태양 같은 젊은 그대.’
 
경기는 결국 패배로 끝났지만, 붉은 악마는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속에 서있노라니, 불현듯 이런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니, 축구란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예전엔 패배가 속상해서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번에는 아쉽고 안타깝긴 해도 화가 나진 않았다.
 
이동국은 득점왕을 놓쳤고, 김은중은 단 한 경기에 출전했을 뿐이었다. 아픈 발을 참아가며 달린 김남일에게는 부상만이 남았다. 그런데도, 사랑스런 그들은 너무나 젊으니까, 태양 같은 그들은 눈부시게 젊으니까, 다시 일어서서 웃는 일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그런 희망이야말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같은 마음으로, 같은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내 곁에 그 많은 붉은 악마가 없었다면 패배의 아픔은 훨씬 더 크게 남았을 것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같은 리딩에 맞춰, 같은 노래를 부르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이후 두 번 다시 붉은 악마와 함께 같은 자리에 서보지 못했지만. 그 때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마다 그 뒷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선 붉은 옷의 그들에게 고마움이라거나 또는 희미하게나마 동지애 같은 것을 느끼게끔 했다.
 
나는, 경기가 끝나고 다른 관중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그대로 자리에 앉아 경기장 안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고, 선수들이 모두 빠져나간 푸른 잔디 위로는 어두운 고요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조용한 그 푸른 잔디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서 다시 내 나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 나라로 돌아가, 내 나라 선수들의 축구를 보며, 주말 저녁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아시안 컵은 허탈하게 끝이 났지만, 사흘간 붉은 악마와 함께한 시간은 축구에 대한 내 애정만 더 뜨겁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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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중국 축구가 한국 축구에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한 단어이다. 한국 축구 대표팀은 32년 동안 27번 중국과 맞붙으며 16 11무로 한 번도 중국 축구 대표팀에 지지 않는 면모를 보인 바 있다. 하지만 2010년 동아시아 축구 대회에서 중국에 0 3으로 패하며 중국을 상대로 한 무패 행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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