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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낭만, 그라운드

dancingufo 2012. 12. 10. 15:00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sntn_id=6179

 

 

 

2004년부터 3년 동안 전후기리그로 나누어 진행되던 K리그가 2007년에 접어들며 다시 단일 리그로 통합되었다. 더불어 4강 플레이오프로 진행되던 포스트 시즌이 6강 플레이오프로 확대되기도 했다. 당시 축구팬들은 적응 좀 하려고 하면 어느새 바뀌어 버리는 대회 방식에 이런저런 불만이 많았다. 플레이오프에 대해서도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아서 축구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늘 이에 대한 논쟁이 붙고는 했다.
 
하지만 대전팬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대회가 치러지느냐 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일 리그가 되든, 전후기 리그가 되든, 또는 플레이오프가 도입되든 말든 어차피 대전은 정규 리그만으로 시즌을 끝낼 가능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대전 시티즌의 관중들이 펼치는 휴지 폭탄 세레모니.
대전 시티즌은 성적이 그리 좋은 팀이 아니었지만, 관중들의 응원은 늘 뜨거웠다.
 
 
2007년이 될 때까지, 내가 축구장을 다니면서 본 것은 만년 꼴찌다운 대전이거나, 만년 꼴찌답지 않게 돌풍을 일으키다가 결국 얇은 선수층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대전이었다. 2007년의 시작도 그리 다를 바가 없어서, 대전 시티즌의 팬들은 그 해에도 고단한 봄을 보내야 했다. 시즌이 시작된 건, 3 3일이었건만 대전은 첫 승도 거두지 못한 채 4월을 맞았다. 그러고도 보름이나 더 지난 후, 시즌 열 번째 경기에서야 겨우 첫 승을 거두었으니 그 해도 대전의 앞날은 마냥 캄캄하게만 보였다.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3, 대전 시티즌에 부임한 이후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던 최윤겸 감독이 당시 수석 코치이던 이영익 코치와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며 사의를 표명했던 것이다. 3월말에 불거진 사건은 4월초에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결국 6월 중순, 최윤겸 감독이 경질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대전은 오랫동안 팀을 이끌어왔던 수장을 잃었고, 게다가 수석 코치마저 자리를 비워버렸기에 웬만해서는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 대전 시티즌에 김호 감독이 부임했다. 한동안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명장이었다. 온갖 풍파를 다 겪어 봤음직한 이 연로한 감독은 혼란스러운 팀을 재정비하는 데 잘 어울렸다. 금세라도 부서질 것처럼 삐걱대던 팀은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 나갔고, 그렇게 후반기에 접어들자 선수들 간의 호흡도 좋아지면서 가을쯤에는 꽤 괜찮은 경기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들을 지켜보는 게 즐거워서, 추석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는 대전에 들러 경기를 보고 갔다. 때문에 고향에는 저녁 늦게야 도착했지만, 그 경기에서 대전이 대구를 4 1로 크게 이겼기에 나는 충분히 즐거운 추석을 보냈다. 승리란 참 신나는 것이구나, 생각했는데. 대전은 그 다음 경기에서도 전남에 승리를 거두더니, 제주와 광주에도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 처음으로, 대전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즌 마지막 한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돌아보니 대전은 FC서울, 포항 스틸러스, 전북 현대 등과 함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싸우는 입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i] 마지막 경기를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에 따라 어떤 팀에게는 다음 경기가 남아있는 것이 되고, 또 어떤 팀에게는 그것이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시즌 마지막 일주일 동안 내가 느낀 긴장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의 나는 온갖 징크스에 사로잡혀서 옷 하나를 입을 때도 혹시 이 옷을 입었을 때 대전이 패한 적은 없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옛말에 착한 사람에게는 복이 온다고 했으니 대전 시티즌이 6강 안에 들 수 있게끔 하루에 하나씩 착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조금만 기분 좋은 꿈을 꾸면 혹시나 이것이 대전 시티즌의 승리를 뜻하는 건 아닌가 하고 근거 없는 설렘에 들뜨기도 했다.
 
그렇게 설렘과 긴장감과 두려움과 기대감이 뒤죽박죽된 마음으로 다시 퍼플 아레나를 찾았던, 2007 10 14일의 경기를 잊지 못한다. 그 전에도 축구란 것은, 종종 나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간절함을 가지게끔 만들었지만 그 날 만큼 승리가 간절했던 날은 결코 흔치 않았다. 대전 시티즌은 나의 간절함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 버리는 쪽을 택해온 팀이었다, 하지만 그 날만은 꿈꾸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느끼게 해주었고 그렇게 나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대전 시티즌을 만났다.[ii]
 
 
대전 시티즌을 떠올리면, 늘 퍼플 아레나의 뜨거운 열기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대전 시티즌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축하해 주십시오.’라는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벤치를 지키고 있던 선수들이 그라운드 안으로 뛰어 들었다. 잔디 위에는 갓 경기를 끝낸 선수들과, 방금 안으로 뛰어 들어온 선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신들의 기적 같은 플레이오프 진출을 자축했다. 그러한 선수들 곁으로 다가선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번쩍 두 손을 치켜들었고, 또 누군가는 커다란 박수를 쳤다.
 
일렬로 줄을 선 채 관중석으로 다가오는 대전 선수들의 손에는 6강행을 자축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온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퍼플 아레나에는 한 바탕 축제가 벌어진 듯했다. 그 순간이, 우승을 달성한 것이 아니라 고작해야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순간일 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경기들이 많고, 이 경기들이야말로 정말 힘든 경기가 될 거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이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일을 가능하게 했으므로, 절망스럽게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섰으므로, 너무나 힘들었던 시즌의 끝에 다 함께 웃을 일을 만들었으므로, 2007 10 14, 퍼플 아레나의 사람들은 순수한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물론, 시즌은 그렇게 행복하게만 끝나지는 않았다. 2007 시즌은, 어렵사리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대전 시티즌이 6강에서 0 2로 패하면서 끝이 났다. 언제나 대전을 힘들게 했던 울산을 만나,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패해버린 경기였다. 그래서 그라운드 위에 선 누군가는 울었지만, 어쩐지 나는 별로 슬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잦은 패배와, 많은 시련, 끊이지 않았던 좌절 속에서도 여전히 대전 시티즌이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이 날 찍어두었던 경기 영상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미 5년 전의 기억이건만 여전히 뭉클한 마음이 들어 찬찬히 그 영상을 돌려보면, 그 시절 우리와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난다. 그들 중 누군가는 대전 시티즌을 떠났고, 또 누군가는 대전 시티즌이 버렸고, 또 누군가는 더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 날, 우리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던 퍼플 아레나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나의 낭만적인 그라운드가 그리워진다.
 
 
*)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아름다웠던 나의 그라운드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횡설수설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남은 이야기들은, 언젠가 다시 이어나갈 기회가 있겠지요.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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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당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FC서울은 승점 37점으로 5, 포항 스틸러스는 승점 36점으로 6, 대전 시티즌은 승점 34점으로 7, 전북 현대는 승점 33점으로 8위에 머물러 있었다.  
 
[ii]  2007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대전은 수원 삼성에 1 0 승리를 거두었다. 포항 스틸러스 역시 인천 유나이티드에 승리를 거두며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5위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던 FC서울은 대구에 패하며 승점을 얻는 데 실패했다. 대전 시티즌은 FC서울과 승점은 같았으나 다승에서 앞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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