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지구를 지켜라 본문
늦어도 한참을 늦었다.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몇년 전의 일처럼 오래된 기분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처음 보는 놀라운 데뷔작이란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고 그 뒤를 따라 줄줄이 이어지는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의 호평이 있었다. 그러니 보기 전부터 이미 한 서너번 본 영화처럼 친근했고, 그런데도 볼 기회가 잘 생기지 않아서 어떻게든 구해서 봐야겠구나- 생각을 스무번쯤 했던 것 같다.
단순히 기발하다거나 장르의 혼용이라거나 놀라운 상상력- 정도로 표현하기엔 내가 너무 답답하다. 나는 얼마쯤 끔찍해하고 얼마쯤 슬퍼하고 얼마쯤 놀라워하고 얼마쯤 안타까워하면서 이 영화를 지켜봤다. 어쩐지 우스운 기분이라거나 황당하다는 생각 같은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상상력을 가졌다는 사실보다도 이런 상상력을 영화로 만들어 낼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장준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이 영화는 분명, 천재적인 데가 있는 상상력과 자신이 상상한 것을 뚝심있게 표현해낼 수 있는 용기의 결합물이다. 둘 중 한 가지만 가져서는 이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해서 장준환은 놀랍고도 대단한 감독이다. 세상에 볼만하고 감동적이고 재미있고 좋은 영화는 많지만 <지구를 지켜라>와 같은 영화는 흔치 않거나 거의 없다.
대다수의 관객에게 외면 당한 아픔이야 있겠지만, 영화인이나 영화 매니아들에게는 99%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을 테니- 늦어도 한참 늦은 이 때 이 영화를 두고 소란을 떠는 일은 새삼스러울 것이다. 그저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 반드시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은 작가가 있었듯 그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영화를 만들어야만 할 것 같은 감독도 있다는 사실이다. 내 눈 앞에 있는 장준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천재이다. 세상물정 모르기 때문에 사는 데 있어 간혹 어려움이야 겪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천재이니 이 감독은 반드시 영화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매너리즘에 빠지고, 쉬운 길만 생각하고,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을 바라보지도 보여주지도 못하는 '한국 영화'에- 숨을 불어넣어야만 한다.
너무나 괴로운 현실 때문에 도저히 제 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으므로 병구는 미쳐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나와 같은 종일 인간이 싫어서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믿은 나보다는 외계인 때문에 자신의 종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종과 자신의 종이 살고 있는 행성을 지켜야겠다고 마음 먹는 병구가 훨씬 더 긍정적인 인간상이다. 그것이 환상이든 망상이든 도망가는 대신 투쟁하기로 결심한 병구의 용기는, 이 미친 상상력을 결국 영화로 만들어낸 장준환의 용기 만큼이나 대단한 것이 아닌지. 앞으로 이 영화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멋지고 독특한 영화 중 한 편으로 언제까지고 이 영화가 남아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나저나, 신하균은 이제 정말 최고 중에서도 최고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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