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여고괴담 네 번째 이야기 - 목소리 본문
영화를 보기도 전에 그런 법석을 목격하지는 말아야 했다. 나는 어차피 이 시리즈의 팬임을 자청할 사람이고, 주위에서 어떤 부추김을 넣지 않아도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터였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기도 전에 자기네들끼리 미리 공모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는 기사들 따위 읽지 않는 쪽이 더 좋았다. 시리즈를 구원할 것이라느니, 공포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느니, 시작도 전에 난리법석을 떨어버리는 통에 정작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김이 빠져 버렸다.
이유도 모른 채 학교에서 살해당한 후 학교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영언은, 선민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캄캄한 학교에 혼자 남는다. 그리고 나는 혼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은 영언을 보면서 영언이 느낄 공포와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하여 마음이 아프다. 이 영화는 관객을, 눈을 감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대신에 안타까워하고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감수성이나, 얼마나 감정이입을 잘 해내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영화는 또 하나의 '슬픈 공포 영화'가 맞다. 예를 들면 <장화, 홍련>이나 <4인용 식탁>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영화가 같은 시리즈의 두번째 이야기보다 '좋다'라고 느끼진 못한다. 더 공을 들여, 더 매끈하게 만들어졌다는 건 알겠지만 그 때와 같은 감정의 진동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영화 속 아이들은 점점 더 예뻐지고, 영화 속 학교도 점점 더 최첨단의 건물로 변해가지만, 영화가 주는 감동까지 함께 커지지는 않는다. <목소리>를 보고 난 저녁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두번째 이야기에서 옥상 위를 노닐던 효신이와 시은이다.
<목소리>가 초반에 만들어낸 우아한 슬픔과 공포를 마지막까지 이끌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 모든 관계를 지나치게 동성애 위주로 설정한 것과 둘, 그리하여 사건의 중심에 놓인 '감정'이 여고생들의 여리고 불안한 감수성보다도 치정 사건에 얽힌 질투와 배신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고생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성애 모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해도, 사랑하는 이를 뺏고 뺏기는 데서 생기는 원한과 분노가 중심이 될 것이라면 우리가 굳이 '여고'괴담을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적어도 나에게 <여고괴담>이 지니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목소리>는 볼만한 영화이긴 하지만, 확실히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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