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8월 10일, 딱딱한 심장 본문
지하철 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있었다. 사무실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고, 지하철 역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던 우리는 택시를 타고 역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택시를 타고 내리는 동안 기습처럼 내 옷에는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물기를 머금은 온 몸과 잔뜩 젖은 우산을 처치곤란해하며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택시의 앞유리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를 생각했다. 금세 유리가 부서져 내 이마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빗줄기였다. 나란히 앉은 택시기사는 손님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듯한 어투의 말들을 끝도 없이 게워내고 있었다. 나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버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후두둑 유리창을 치고 가는 빗줄기는 금방이라도 내 머리 위로, 내 어깨 위로, 내 두 팔과, 앉은 내 허벅지 위로 쏟아질 듯 시원한 소리를 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비속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는 일은 너무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전화를 걸어, 가방 속에 우산을 넣고 다니던 너를 부르고 싶었다. 삶의 어느 순간에는 다시 너를 만나고 싶은 유혹 때문에 나는 가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생각들로 계단을 오르고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지하철 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거짓말처럼 이미 비가 그친 후였다.
코끝이 찡했다. 창가에 붙은 채로 누워서 빗소리를 들었다. 앞서 걸어가던 여자의 손과, 그 여자의 손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생각했다. 종종 누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무언가를 제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것은 미지근한 열정과 모호한 꿈. 마지막으로 놓은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던 마음이었고, 그런 사실을 깨달을 때면 이제 나에게 남은 사랑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불안함에 빠졌다.
새벽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당 안으로 신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빗물에 접지 않도록 비닐에 쌓여져 있을 터였다. 옷을 갈아입고 불을 끄고 창문을 꼭꼭 닫은 후에 나는 잠을 청했다. 꿈 속에 당신이 나올 거라걸 이미 알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떠오른 것은 얼굴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손을 잡고 있던 감촉.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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