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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교육

웰컴 투 동막골

dancingufo 2005. 9. 8. 03:37



01.

영화를 보다가 문득, '동막골'은 혹시 자살을 기도하던 표현철의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나 행복하여 환상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이 현실을 살고 있는 나의 한계이다. 나는 그런 마을을 상상속에서라도 현실이라고 그릴 수가 없다. 하여, 그것은 죽음을 앞둔 표현철의 환상이었을 거라 생각을 해본다. 표현철은 자신이 수많은 민간인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씻어버리고자, 환상속에서나마 민간인(동막골의 사람들)을 위해 죽어간다. 인민군과 연합군과 다 함께 평화롭고자 하는 것도 전쟁에 지친 표현철의 환상일 것이다. 그 때 그 산 속, 탈영하여 혼자 남은 표현철은 자신에게 겨누었던 방아쇠를 당겼고 그리하여 혼자 죽어가던 중에 환상을 만난다. 그 환상이 바로 '동막골'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본 것은 바로 전쟁의 상흔을 지울 수 없어 죽어가는 한 군인의 환상인 셈이다.


02.

그 환상의 중심에 바로 '여일'이 있다. 여일은 미쳤다고 생각될 만큼 순수하거나, 미쳤기 때문에 순수한 여자이다. 여일의 나이대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이 인물이 어떤 특정 시기의 여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순수와 낙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표현철이 꿈꾸는 것은 남한군도, 인민군도, 연합군도 똑같이 마주 대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인민군에게 남한군을 가르키며 "쟈들하고 친구나?"라고 물을 수 있는 여일이야 말로 표현철이 원하던 대상일 것이다.


03.

이렇듯 내가 이 영화를 하필이면 '표현철'의 환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인물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현실에 등을 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각각의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야 차이가 있겠지만) 판타지와 현실이라는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있고, 그 전자의 중심이 여일이라면 후자의 중심은 표현철이다. 일견 다른 군인들과 별 차이가 없는 캐릭터로 보여질 수 있겠으나 실제의 6.25 전쟁이 남긴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은 표현철 뿐이다. 때문에 군인들이 동막골 주민들을 위해 벌이는 마지막 싸움의 지휘자는 표현철이 되는 것이다. 표현철이 지니고 있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우리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전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이며, 그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씻어내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것 역시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전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04.

그렇게 영화는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마냥 행복한 척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여일은 동막골 주민 중에서 유일하게 동막골을 떠나는 인물이 된다. 더이상 여일은 없다. 동막골도 없고 판타지도 깨진다. 이 시점에서 표현철은 삶을 떠나 죽음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얀 눈밭 위를 뛰어다니며 표현철은 죽음을 기다린다. 더이상 삶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는 표현철에게 주어지는 것은 팡팡- 불꽃이 터지는 아름다운 죽음이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씻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슬프거나 쓸쓸하지 않은 죽음이 된다.


05.

그렇게 영화는 그 자리에서 끝을 만난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한동안 즐겨보던 영화 잡지마저 싹 끊고 살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동막골을 찾았던 군인들의 죽음은 일찌감치 예상된다. 판타지의 끝이 종종 씁쓸해지는 것은, 마지막까지 현실과 접점을 가지지 않고 가는 판타지가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지른 후, 수줍은 여인과 눈이 마주친 리수화를 보는 순간 나는 울음이 터진다. 그런 현실. 다 외면하지 못하는 현실. 그런 것들을 마주칠 때면 지금까지 내가 웃으며 행복해했던, 지금까지 온전하게 내가 즐겼던, 이 판타지를 어떡해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06.

강혜정의 나이를 잃어버린 얼굴. 정재영의 다시 또 새로워지는 얼굴. 신하균의 슬프거나 서러운 얼굴. 그런 것들이 참, 훌륭하게 잘 조화가 되어있는 영화다. 바로 이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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