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Real, 레알, 나의 레알 마드리드 본문
그 곳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이다. 중세의 기사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그 성의 담벼락을 넘어서면 잔디가 보인다. 드넓은 초록색 잔디다. 난 진초록이 인간에게 얼마나 과한 평화를 주는 색인지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런 나를 기특하게 여기기라도 하듯 카메라는 천천히 잔디를 돌면서 다가간다. 물론 도착지는 그 자리다. 그 사람들의 얼굴, 바로 그 앞에서 카메라는 멈춘다.
이름은 한 명의 것씩, 차례대로 보인다. 나는 웃는 그들의 얼굴과, 그들의 어여쁜 이름을 번갈아가며 본다. 지네딘 지단. 호나우도. 파본. 왈테르 사무엘. 구티. 루이스 피고. 이반 엘게라. 이케르 까시야스. 로베르토 까를로스. 솔라리. 조나단 우드게이트. 토마스 그라벤센. 마이클 오웬. 데이비드 베컴. 미첼 살가도. 룩셈부르고. 낯익은, 눈에 익은, 너무나도 귀에 익은 그 이름들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조금 웃는다. 진초록색 잔디를 밟고, 하얗고 깨끗한 축구화를 신은 채 그들이 서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가슴이 설렌다. 두근, 뛰는 가슴에 한쪽 손을 올려놓고 나는 이름 하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이름이 나오는 건 꽤 늦어진다. 그리하여 어디로 갔을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까만 머리칼이 화면 앞에 나타난다. 그의 머리칼은 곱슬곱슬해서 마치 어린 사내녀석의 머리칼 같다. 빙긋. 나는 웃는다. 방긋. 그도 웃는다. 라울 곤잘레스. 그 웃는 얼굴 밑으로 그의 이름이 나타난다. 그리고 시작된다. 나의 로맨틱한, 레알 마드리드와의 데이트는 그렇게 말이다.
물론 영화의 스토리는 얼마쯤 조잡하고, 나름대로 지루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조금 우습고,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유치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비난하길 바래서는 안 된다. 내가 이 영화를 재미없게 볼 거란 기대도 해선 안 된다. 나에게 이 영화는 지금까지 그 어떤 영화도 안겨주지 못했던 깜짝 놀랄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것은 큰 극장 화면에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말소리나 웃음소리, 숨소리가 들리고 한번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그들의 락커룸을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달리고, 넘어지고, 다치고, 한숨 쉬고, 환호하며, 다시 달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박수를 보내고, 깜짝 놀라고, 탄성을 내뱉고, 마음 아파하며, 즐거워하다가, 다시 박수를 보낸다. 이것은 내가 이 영화 속에 담긴 것과 나 자신이 하나라는 일체감을 느끼는 탓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좋아해온 그 어떤 영화도 내게 주지 못한 것이며, 이 영화의 영화적 완성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이 속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나의 레알 마드리드이기 때문이다.
라울이 깜빡 눈을 감는다. 나는 세상에 저토록 낭만적인 속눈썹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다. 찢어진 눈두덩이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난다. 꾸욱 그 피를 눌러닦는데 라울이 찡긋 인상을 구긴다. 짧은 치료를 끝내자마자 휘익 라울은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 위를 본다. 달리는 제 동료들을, 제 동료들의 앞을 막는 상대팀 선수들을, 놓칠 수 없어서 그 시선은 한 곳에 박힌다. 나는 지금 저 사람이 쉬는 한숨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린다는 착각에 빠진다. 빠르게 달려 심판의 곁으로 가서면, 골대 앞으로 뛰어든 지단에게서 첫번째 골이 터진다. 서있던 라울의 어깨가 들썩한다. 앉아있던 관중들이 번쩍 두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큰 함성소리가 있다. 지단의 부상을 알아챈 것은 얼마후의 일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경기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마음이 벅차다. 그라운드 안으로 뛰어든 라울이 깜- 빡- 눈을 감았다 뜨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어느 새 소년의 테를 벗어버린 지 오래다. 그는 예전에 어여뻤던 모습을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달리고 있는 라울 곤잘레스의 모습이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아름다움도 능가할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시 마음이 벅차다. 이 사람들이 좋다. 이것은 몇년만에 처음, 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나의 확신이 된다.
아마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좋다고 말하는 나를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좋다고 말하는 나에게 동의할 것이다. 물론 영화는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 평가받을 일이겠지만, 나만은 이 영화에 대해 어떤 평가도 할 수 없는 것이 맞다. 이것의 장르를 따지기 전에, 의미나 목적이나 완성도를 따지기 전에, <Real>은 내게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Real>은 그저 레알, 나의 레알 마드리드이기 때문이다.
구티가 이 팀에 있는 한 늘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 엘게라나 까시야스가 이 팀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지단이 늙어가고 하여 예전의 지단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 피구나 모리엔테스가 결국 이 팀을 떠나고 말았다는 사실. 그런 사실들은 가끔 나를 안타깝고 쓸쓸하게 한다. 하지만 가끔 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들이 보여주는 질식할 것 같은 경기. 그 경기가 가져다준 승리. 그 승리가 가져다준 기쁨을 떠올리면 그런 안타까움이나 쓸쓸함은 숙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단 생각이 든다. 한 명의 축구팬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팀의 이름이 붙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하여 결국, 이 미흡하고 부족하며 유치한 영화는 내 인생에서 아주 특별한 영화로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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