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정민, 미쳐야 미친다. 본문
김탁환의 백탑파 이야기 시리즈에 등장하는 '김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화광'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아주 명민하고 덕이 있는 약관의 젊은이다. 그리고 그의 호를 보면 짐작하겠지만, 그는 꽃에 미쳐 있다. 한번 자기의 집에 틀어박히면 꽃을 살피고 연구하느라 몇 달 동안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손님이 찾아가도 꽃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런 김진은 의금부 도사이자 소설의 화자인 이화명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데 여러가지 영감을 주는 존재이다. 즉, 이화명과 함께 소설의 주인공이락 해도 좋다는 뜻이다. 백탑파 시리즈에 등장하는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의 북학파 학자들은 모두 다 실존 인물이지만 김진과 이화명은 가상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에서 김진의 모델이었을 거라 예상하게 만드는 이를 발견했다.
<미쳐야 미친다.>는 조선 지식인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열정이나 광기를 다룬 책이다.
“사람이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란 글자는 질((疾)에서 나온 것이니, 병 중에서도 편벽된 것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 박제가, 《백화보서》
라는 글과 함께 시작하는 이 책은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다는 석치(石癡) 정철조나, 담배를 너무 좋아해 아예 담배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책을 엮었다는 이옥, <백이전>을 1억1만3천 번(조선 시대에는 10만이 1억이었다고 하니 11만 3천 번을 읽은 셈.)이나 읽었다고 하는 독서광 김득신 등 특이한 벽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꽃에 미쳐 있었다는 김덕형이란 인물도 등장한다. 박제가나 홍대용 등이 이 김덕형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어떤 책에서는 그냥 김씨라 하고 어떤 책에서는 김덕형이라고 이름을 밝히고 있다. 꽃을 너무 좋아하여 꽃을 연구할 때면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는 구절을 읽으며 나는 이이가 바로 김진의 모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의문에 관한 대답은 작가 김탁환만이 해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곳에서 뜻하지 않게 김진과 닮은 이를 발견하자 무척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1부는 벽(癖)에 들린 사람들, 2부는 맛난 만남, 3부는 일상 속의 깨달음이란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1부의 이야기들이 가장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지능이 매우 낮았지만 책에 미쳐 있어 결국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는 김득신에 관한 이야기다.
미치다, 라는 것은 그다지 좋은 뜻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역시 무언가에 미칠 정도로 빠지지 않는다면 다른 이를 미치게 만들 수도 없다는 말은 참으로 마음에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