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dancingufo 2008. 9. 26. 01:38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래서 결국 다음 역에서야 겨우 내릴 수 있었을 만큼, 이 책은 정말이지 대단히 흥미롭다. 책의 첫 장을 펼치고 두 세장만 넘기고 나면 단숨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결국엔 책읽기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 짜증이 나, 잠도 자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버린 후 이렇게 맛있는 책읽기란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도리스 레싱, 벌써 두 번째 이렇게 나를 즐겁게 만든 작가.

해리엇과 데이빗은 고풍스러운 저택에 살며 대가족의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아이를 낳던 해리엇이 자신들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예감한 건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후이다. 아이는 배속에 있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끊임없이 해리엇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 결국 약의 힘으로 아이를 진정시키며 7개월을 버텨낸 후, 해리엇은 '벤'이라는 사내 아이를 낳는다.

벤은 아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벤은 태어났을 때부터 해리엇의 사랑을 원하거나 필요로 한 적이 없으며, 자신과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결국 다른 가족들이 벤을 요양 시설에 보내버리지만, 해리엇은 벤에 대한 모성애를 다 버리지 못했기에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이후, 해리엇의 가족은 더 이상 행복을 꿈꿀 수 없게 된다. 아이들은 해리엇을 떠나고, 남편 데이빗은 일에만 빠져 살았으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넷째 아이 폴은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아이가 된다.

결국 다섯째 아이인 벤으로 인해 오랜 시간 꿈꾸어 온 행복을 놓치게 된 해리엇은, 행복하게 살려는 자신들에 대한 신의 형벌이 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해리엇과 벤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놀랍게도 나는 해리엇이 벤을 버리거나 포기하기를 바라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벤을 무서워하는 나와, 동시에 벤을 안쓰러워하는 나를 발견했으며, 어째서 신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게끔 내버려두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나 또한 발견했다. 삶 앞에서 이렇게 무력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나를 발견했으며,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삶의 기습을 두려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길지 않은 이야기로, 나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도리스 레싱. 이 작가의 좀 더 많은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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