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9년 7월 11일,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9.01 ~ 2009.12

2009년 7월 11일,

dancingufo 2009. 7. 12. 02:48

01.

저녁부터 비가 내린다. 선풍기 하나 틀지 않은 방이건만, 창문을 열어두니 한기가 느껴진다.

어릴 땐 추위를 모르고 살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한여름에도 툭하면 춥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늘 한기를 느껴서 작은 담요를 둘둘 감고 앉아 있기도 한다. 에어콘 없이 못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히려 나는 지하철 안도 사무실 안도 추워서 탈이다. 오후 한 시, 쨍쨍한 태양 아래서 십오 분 길을 걸어 사무실에 도착하면 목 뒤가 땀으로 끈적거리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더위가 끔찍하지는 않다.

갈수록 여름이 더워진다고들 하니 어릴 때보다 더위가 덜 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체질이 좀 달라진 모양이다. 사주오행에 불이 많아 온 몸이 불덩어리라는데, 그래서 낮에는 내내 비실거리다가 해가 지고 나면 힘이 나는 타입이라는데, 요즘엔 어째서 이렇게 온 몸이 찬 건지 모르겠다. 이제야 깨닫는 것이지만 서울은 한여름에도 긴 팔 옷 없인 살아내기가 힘든 도시다. 이 도시의 곳곳은 어째서 이다지도 추운 것일까.


02.

저녁에 공부를 끝내고 몇 장 남지 않은 <중국 견문록>을 다 읽었다. 한비야는 필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있다. 자기 소신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면 쉽게 감탄하고 많이 감동받는 나같은 독자에게 적합한 작가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도 괜찮았고, 이번 책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다음 책으로는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선택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다음에 무슨 책을 읽을까, 하고 책장 앞에 서는 시간이 참 좋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단박에 이 책을 선택해서 들었다. 사실 벌써부터 읽었어야 할 책을 몇 주나 미룬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내가 가진 유시민의 책은 모두 다 읽은 것이 된다.

쓰려고 마음 먹은 게 하나 있는데, 그럴려면 일단 이 책을 읽어야겠다. 주제 넘은 짓, 이 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먹는 것을 보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허영심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나는 한쪽 발만 담갔을 뿐이지만, 누구보다도 많이 생각하고 있으므로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03.

나는 책장에 책을 정리할 때 나라에 따라 정리를 하는데, 최근엔 노통이나 유시민과 관련된 서적들을 여러권 구입한 덕분에 한국칸이 꽉 찼다. 한동안 한국 작가의 책을 잘 읽지 않아서, 다른 쪽엔 칸이 부족한 중에도 이쪽엔 빈 자리가 꽤 남아 있었는데 말이다. 이 자리가 쉽게 차진 않겠구나, 싶었는데 그 자리를 노통과 유시민의 이름으로 채웠다. 생각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로써 더 이상은 새 책을 꽂을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책장 정리를 좀 해야겠다 싶어 쳐다보고 있자니, 버리자 마음 먹으면 버릴 것도 참 많다. 몇년 전에 꾸준히 사보던 잡지라든가 대학 시절 썼던 레포트나 노트 같은 것은 이제 그만 버려도 상관없을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다. 뭔가를 버리는 데는 미련스러울 만큼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뭐든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이건 안 쓰는 거냐, 물어볼 틈도 없이 내다버리기 바쁘던 엄마와는 정반대의 기질이다.

며칠 후면 주문한 새 책들이 또 도착할 텐데, 아마도 난 그 책들을 이미 꽂혀 있는 책 위에 올려 놓을 것이다. 그리고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버려도 좋을 것들을 끝까지 버리지 못할 터. 뭔가를 버리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고작 잡지나 노트가 이러할진대, 기억이나 사람을 대체 어떻게 버린다는 말인가.


04.

내일은, 혼자 버스를 탈 생각이다. 비도 올 것이고 하여 가지 말까 생각을 했지만 오랜만에 좋아하는 언니와 만나기로 한 것을 동행이 없다고 취소하긴 싫어졌다. 그래서 혼자라도 가자, 마음을 먹고 보니 어두운 하늘 아래 불을 밝히고 서있을 퍼플 아레나가 떠올라 잠깐 가슴이 설렜다.

아직도 심장이 뛴다. 사랑은 때때로 너무 쉽게 무덤덤해지지만, 그래도 그리 쉽게 소멸하진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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