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살인의 추억 본문
내가 봉준호를 처음 만난 건, 네임밸류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수수한 얼굴에 이상스런 기민함이 엿보여서 특별히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배우 이성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성재라는 그 배우 만큼이나, 수수하고 평범한 듯 하지만 그 속에 흔히 '촌철살인'이라 표현될 만한 유머와 냉소가 함께 느껴진 플란다스의 개는,
누구를 비판할 의도도, 누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의도도 없던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어떤 무형의 메세지가 마음에 들어왔다. 어떤 말로도 정리할 수 없는 메세지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고 또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메세지. 그것이 내가 '봉준호'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 후 3년이 지난 후에 봉준호가 새 작품을 준비한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아- 그 봉준호 싶어서 관심을 가지려하니 이미 그의 차기작은 대박의 기운을 몰고 오고 있었다. 시나리오 좋다고 충무로에 입소문이 쫙 퍼져버린, 반드시 대박을 몰고올 것만 같은 준비된 영화.
그래서 내가 좀 씁쓸했던가. 나만 알길 바랬던 보물섬을 모두가 알아버린 느낌 때문에.
봉준호는 특별하지만 평범한 감독이다. 살인의 추억은 완벽하지만 무난한 영화이다. 그렇지만 역시 봉준호는 좋은 감독이고 살인의 추억은 훌륭한 영화이다. 무엇을 흠잡아야 할지 몰라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 지나간 한 두어 장면만 다시 봐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처음엔 그랬다. 박현규가 범인일 거란 생각을 거두지 않은 채, 비록 그의 눈은 맑고 오묘했다해도 박현규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 섬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박현규가 아니라 박해일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 소름이 끼쳤다.
말간 얼굴에 과묵하고 고운 대학생 같은 얼굴. 그렇지만 그 눈빛을 다시 떠올릴 때면 나는 가끔 몸을 떨었다. 네가 정말 죽였지? 무서운 새끼, 그런데 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박현규 그가 왜 이토록 못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술에 취한 청년은 차가웠을 것이 분명한 방에서 혼자 웅크려 잠이 들어 있었다. 그 청년을 다짜고짜 끌고 나온 형사는 그에게 무분별한 폭력을 가했고, 힘으로는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는 청년은 그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그리고 하얀 얼굴로 선홍색 피를 흘리며 청년은 물었지. 그래 내가 죽였다, 이 말이 듣고 싶지? 허무하고 슬픈 눈빛. 청년은 왜 그런 곳에서 혼자서 살아가고 있었을까?
송강호가 얘길한다. 밥은 먹고 다니냐, 씨팔. 그 순간에 어쩐지 울컥 눈물이 난다. 진범이냐 누명이냐 하는 것과 무관하게, 살인의 추억에서의 박현규는 너무 슬프다. 아주 짧은 순간 모습을 드러내고도 커다란 무게감으로 영화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했을 박현규의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라면 그저, 살짝 미칠 만큼 오묘해보이는 박해일의 눈빛 때문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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