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Closer 본문
그러고보면 한번도 주위의 누군가에게서 '쥴리아 로버츠를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걸 들어본 적이 없다. 특별히 이쁘다거나 귀엽다거나 섹시하다거나 지적이다거나 청순하지 않기 때문에- 유명하기는 할 망정 딱히 유난스런 애정을 쏟아부을 대상은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꽤 오래전부터 이 여배우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해왔다. 그것은 벌써 15년 전 이야기인 [프리티 우먼]에서부터 시작된 태도이고,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달리 큰 변화를 맞이하거나 그럴 만한 이유도 없었던 태도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사진작가 안나는 남편과 별거하고 있던 어느 날 '낯선 남자'인 댄을 만난다. 댄은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쳐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렸던 앨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내 작가가 된 남자이다. 그리고 그 책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안나를 찾아왔다가, 앨리스를 만났던 그 때처럼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앨리스의 존재를 알고 있고 앨리스의 눈물을 보았던 안나는 그런 이유로 해서 댄을 거절하고, 대신 댄의 장난으로 우연히 알게 된 래리와 결혼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영화는 장면이 바뀌면서 시간과 수많은 사건과 그리하여 생겨났을 여러가지 감정을 뛰어 넘어, 안나가 댄을 사랑하고 있는 시간으로 직행한다. 댄은 앨리스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안나와의 여행을 준비하고 안나는 래리에게 댄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래리와 살고 있는 바로 그 집에서 댄과 섹스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앨리스는 댄을, 래리는 안나를 떠나고 안나와 댄은 연인 사이가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또 여기가 아니다. 안나는 한번만 같이 자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겠다는 래리의 말에 응하고, 자신을 만난 이후에도 안나가 래리와 섹스했음을 알게 된 댄은 안나와 헤어져 버린다. 래리는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연적의 옛 연인인 앨리스를 찾아가 그녀의 스트립쇼를 즐기고, 앨리스는 안나를 떠나 자신에게 돌아온 댄을 되찾는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끝은 또 다시 여기가 아니다. 댄은 자신이 앨리스를 떠나있는 동안 앨리스가 래리와 섹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토록 어렵게 되찾은 앨리스를 다시 잃어버리며, 래리에게 돌아간 안나는 그렇지만 허무함만 남은 표정으로 래리의 침대 옆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상대인 줄 알았던 댄을 잃고(또는 버리고) 런던을 떠나온 앨리스는 '낯선 남자' 댄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그 때처럼 뉴욕의 거리를 걷는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러니까 보통의 멜로물이라면 한번의 만남과 이별까지의 (또는 재회까지의) 과정이 스토리의 주가 되겠지만, Closer는 거기서 '과정'이라는 것을 기름기 짜내버리듯 싹 빼버리고, 여러번의 만남과 이별만을 보여준다. 때문에 분명 멜로를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맨틱한 연애장면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다. 대신 그 자리에는 연인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연인의 새 애인이 자신보다 섹스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만 추궁하는 마초틱한 질문이나,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던 여자에게 첫눈에 사랑하게 된 또 다른 여자 때문에 거짓말을 늘어놓는 씁쓸한 장면이 들어앉는다.
이 영화의 네 주인공(앨리스와 안나, 댄과 래리)은 서로 엇갈리며 사랑하고 배신하고 기만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거짓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듯 거짓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또는 사랑했던) 사람에게도 두고 두고 흉터로 남을 비수를 던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기도 하다. 한 여자를 첫 눈에 사랑하게 되었다면 또 다른 여자를 첫 눈에 사랑할 가능성도 높으며, 결혼 전에 가지고 있던 음란한 습관이나 폭력적인 태도는 결혼했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고쳐지지 않는다. Closer는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은 그 태도가 지적이며 차분하고 유난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한 것은 바로 그 적정한 온도를 유지한 화법 때문이다. 이 영화가 현대인들의 사랑이나 연애를 '직시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사랑을 직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마다 다른 사랑을 하고 있고 가지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 사랑을 바라보는 태도가 '어떤 하나의 태도'로 규정될 순 없다. Cool한 것을 하나의 미덕처럼 생각하게 된 현대인들은 무엇이든 제대로 Cool하게 그리면 그것이 '정답'이라도 되는 듯 기립박수를 보내지만, 그것은 그냥 하나의 태도로 받아들여져야지 Cool한 것은 옳고 그렇지 못한 것은 그르다- 라고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 이 영화가 사랑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시선 역시 다양한 시선 중 한 가지일 뿐이지,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이 영화의 훌륭함, 또는 그렇지 못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금만 더 넉넉해졌으면 좋겠다. 이것이 사랑에 관한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느라 급급한 평들을 보고 있자면, 대체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지 당신은 알고 있는 거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영화라는 매체가 과장하고 오버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때문에 나는 로맨틱한 멜로물을 즐기지는 않지만 그에 대해 비난할 생각 역시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자신이 가진 시선을 진실로써 내세우는 것 역시 나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영화가 있고, 그 영화들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이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떠어떠한 시선을 가진 어떠어떠한 영화를 선택해서 보고 선택해서 좋아할 뿐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가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손을 들어주길 바라는 것은 지나치게 유아적인 사고방식 아닌가.
뻔뻔하고 속물스럽고 마초틱하지만 그럼에도 감정 이입이 가장 쉬운 래리 역의 클라이브 오언이나, 지적이면서도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면서도 자기 본능에 충실한 안나 역의 줄리아 로버츠. 유약하고 이기적이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인 댄 역의 주드 로. 그리고 열 여섯이면 이미 다 자란 성인임을 뽐내는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서 스물 셋이나 된 후에야 처음으로 성인 연기자로의 변신에 성공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보이는 것은 여전한), 이 영화 속 관계의 핵심인 앨리스 역의 나탈리 포트만까지. Closes는 단 네 명의 배우만으로도 빈 틈 없이 꽉 찬 한 편의 영화가 된다. 게다가 대사는 날카로우면서도 위트있고, 분위기는 세련되었으며,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하니- 나는 이 영화에 만족한다. 한 편의 영화가, 이보다 더 괜찮기도 사실은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