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7월 27일, 바람이 분다 본문

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2005년 7월 27일, 바람이 분다

dancingufo 2005. 7. 28. 01:54

01.

바람이 분다. 저벅저벅- 거리를 밟아 내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시원하다. 기분이 좋아진다. 발자국 소리도 흥겨워진다. 저벅저벅- 여름이 되면 좋은 것 하나. 스타킹을 신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여름이 되면 좋은 것 둘. 언제나 샌들을 신을 수 있다는 것.


02.

며칠만에, 시원해진다 싶더니 비가 내릴 모양이다. 샤워기를 잠그자 창 밖으로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욕실에 난 작은 창문으로 슬그머니 밖을 내다본다. 바람이 분다.


03.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아서, 오랜만에 친구와 수다를 떤다. 별로 즐거운 소식을 전하는 전화도 아니었건만,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었던 애들처럼 우리는 하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역시 대화의 화제는 공통의 관심사여야 좋은 것. 요즘 친구와 나는 싫어하는 것이 같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들처럼,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하하하- 큰 소리를 내면서 웃는다.


04.

내 삶과 누군가의 삶. 그 경계선은 어딜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 밤. 과연 접점지역이 있기나 한 걸까, 라는 의문이 문득 드는 밤.


05.

그 거리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서. 그 때 우리가 나란히 앉았던 커피숍의 의자. 그 때 우리가 나란히 구경했던 상점의 옷들. 그 때 우리가 나란히 들락거렸던 음식점들도 그대로 있고, 그 때 우리가 나란히 헤매였던 골목들도 그대로 있다. 이제 그 거리에 없는 것은 내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은 너이고, 이제 그 거리에서 달라진 것은 늙은 여자처럼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이다. 너와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06.

어두운 창 밖에서 자꾸 소리가 들리고, 인적 없는 골목에서 자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굳어버린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아버리고,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 돌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살고 있는 내가 숨막혀 온다. 그냥 바람의 소리라고, 그냥 바람의 흔적이라고, 어째서 생각해버릴 수 없는 것일까. 자문.


07.

알고 있다. 이런 것은 좀, 꼴불견이다. 지나치게 민감해지고, 예민해지고, 그래서 쉽게 짜증이 나는 대화의 주제. 김은중은 지금 내게 그런 존재다. 나 스스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아무 말도 듣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이 상태의 나를 위로하려는 말도, 이 상태의 나를 설득하려는 말도, 이 상태의 나를 납득시키려 한다거나, 이 상태의 나를 이해할 수 없어하는 말들도, 이 상태의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말까지, 전부 다 똑같이 내 신경을 건드린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늘 있어왔던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똑같이 슬퍼하는 상태. 매번 똑같이 화를 내는 상태. 바보같은 상태다. 꼴불견인 상태다.


08.

바람이 불고, 운동장으로는 모래가 흩날리고, 교무실에서는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고, 그 모래바람 사이로 소년이 거닐어 오는 장면. 마음이 설레는, 아리는, 괴로워지는. 바람이 분다- 라고 그 때 나는 그렇게 적었던가. 바람이 분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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