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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교육

박수칠 때 떠나라

dancingufo 2005. 9. 5. 01:07




01.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피의자는 미모의 카피라이터이다. 용의자는 현장에서 잡혔다. 단번에 풀릴 줄 알았으니까, 사건을 맡은 검사는 자신만만하다. 하지만 사건은 풀어나가려 할수록 복잡하게 꼬인다. 용의자와, 증언자들과, 이 사건을 생방송으로 중계하는 방송국 사람들과, 범인을 잡으려고 데려온 무당들까지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이 하나 둘 세트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이 사건의 끝을 볼 때까지, 아무도 세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02.

이야기는 새롭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살인사건이 있고, 그 살인사건의 진범을 찾는 끝을 봐야만 영화는 끝이 난다. 용의자로 지목된 김영훈이 진범이 아닐 거라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참 많은 오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영화, 참 좋다. 영화가 지니고 있는 논리적인 오점들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생각지 않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차승원의 발전에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차례대로 등장하는 조연들의 연기는 너무나 맛깔스러워서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훌륭하단 생각을 하게 한다. 수사본부 세트는 차갑고도 신비로운 빛을 발해 영화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너무 선해서 오히려 악하게 느껴지는 신하균의 얼굴과, 목소리와, 몸짓은, 이 영화의 백미다.


03.

"난 당신을 존경해요."
"당신은 반드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아니, 나는 여자예요."

소리지르고, 웃고, 카메라를 노려보는 신하균을 바라보며- 지금 저 배우가 바로 내 앞에 서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신하균의 얼굴과, 목소리와, 몸짓은 여리고 불쌍하여 연민을 자극하는 동시에 섬뜩하고 차가워서 무섭게 느껴진다. 절대로 범인일 리 없다고 생각하게 하지만,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다시 '혹시 진짜 범인이 너야?'라고 묻게 만든다. 이 영화에 서스펜스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신하균이다. 신하균의 존재이며, 신하균의 연기이다.


04.

물론 끝은 조금 생뚱맞고 진부하다. 불필요한 대사나 설정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영화의 대사들이 지닌 '말의 힘',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힘', 스탭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스타일의 힘', 시나리오가 자랑하는 '서스펜스의 힘' 그 모든 것을 외면할 힘이 내게는 없다. 이 영화는 참 좋다. 좋은 선택이었어, 라고 나를 칭찬해 주고 싶을 만큼 말이다.


05.

영화는 끝나고 마음에 들던 음악이 흘러나온다. 극장을 나오면 시간은 새벽 3시. 택시를 타고 서강대교를 달린다. 수많은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방금 내 앞에서 소리 지르던 배우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오랜만에 영화 때문에 기분 좋은 하루였다.

<간첩 리철진>은 대체 무엇이 재미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킬러들의 수다>는 원빈은 확실히 잘생겼다는 것이 감상의 키포인트였고, <아는 여자>는 그럭저럭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던 중에 이 영화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이제, 처음으로 장진의 유머가 즐거우며 장진의 영화가 좋다는 생각을 한다. 장진은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감독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이 감독이 이 박수를 받고도 부디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박수를 받았을 땐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박수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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