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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교육

이터널 선샤인

dancingufo 2005. 11. 13. 18:27
 
01.

택시는 집 앞이 아니라, 집으로 올라오는 골목 앞에 멈춰선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걸으면서 살짝 찡그리던 조엘의 얼굴을 생각한다. 마음이 아파서 조금 더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걸음을 옮기면서 슬쩍 씁쓸한 듯 웃고 말던 클레멘타인의 얼굴을 생각한다. 마음이 또 아파서 또 조금 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각이 나고, 또 생각이 나서, 결국 나는 구두굽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도 잊고 새벽의 조용한 골목 위를 달린다. 타닥타닥. 내 발소리가 빙글빙글 돌아 하늘까지 닿게 크게 울린다. 나는 집 앞으로 꺾어 들어오는 골목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다. 헉헉. 빨라졌던 심장 박동이 제 자리를 찾느라 숨이 가쁘다. 숨을 고르고 서있는 동안 사람의 모습이라곤 없는 텅빈 골목을 내려다본다. 바람이 불고 있다. 찬 바람이, 반 스탕킹 위로 맨살로 방치되어버린 내 허벅지를 윙윙윙 감쌌다가 멀어진다. 추워서 그랬을까. 무서워서 그랬을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하긴 화장이 엉망으로 지워져버린 것은 택시를 타기 전부터 이미 그랬다.


02.

지우고 싶었다. 어쩌면 지운 척 굴기도 했을 것이다. 분명히 지워져버린 기억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햇수를 세는 일도 희미해질 만큼 오래 전의 일이다. 가끔은 나쁜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못할 짓도 참 많이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나 진부하게 만났다가 너무나 진부하게 헤어져서 나는 그 사랑이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기억으로부터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좀 한심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난 어떤 감정이 든다해도 그에 대한 그 어떤 방법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난 그냥 두 손을 놓고 가만히 살아갈 뿐이었다.


03.

"이런 기억들이 모두 다 사라져."
"응."
"어떡하지?"
"그냥, 음미하자."

어쩌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해도 결과는 똑같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그 기억을 내 현재로 만들 수 없는 한, 나는 무엇도 달라지게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귤색 츄리닝을 생각하고, 마치 이미 연인이 된 것처럼 자신의 치킨 조각을 성큼 집어가던 클레멘타인의 행동을 생각하고, 살짝 맛이 간 애처럼 빈 집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던 클레멘타인의 모습을 생각한다. 나중엔 그다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처음엔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했던 클레멘타인의 것들. 한겨울, 꽁꽁 언 강위에 나란히 누워있던 그 기억에 다다르면 '제발 이 기억만은 지우지 말아줘'라고 말하지 않을 자신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어떤 식으로 끝이 났다 해도 사랑의 가장 좋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사랑이 끝나는 일이 안타깝지 않을 사람이 그 누가 있을까.


04.

"Do your best."

다시 시작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조엘의 혼잣말에, 클레멘타인이 말한다. 나를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봐. 그래 난 주문에 걸린 것이다. 날 지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라는 그의 주문. 하나씩 둘씩 지워져가는 기억에서 클레멘타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조엘은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리고, 클레멘타인을 꽁꽁꽁 숨겨두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그 기억이 지워지는 것은 막지 못하고, 그리하여 결국 다시 안녕해야 할 마지막에서 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클레멘타인의 마지막 말.

"좋은 추억이 지워지듯 작별인사나 하자."

우리는 그 때 제대로 된 작별인사라도 했던가. 아니 난 그 때 우리가 작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했던가.


05.

잊어버리는 것 만큼 마음 편한 일은 없다. 사실 다 지우면 그 뿐인 것이다. 난 때때로 지독하게 끈질긴 내 기억력을 원망하고는 했다. 무엇이든 금방금방 잘 잊어버리던 너는, 나보다 열 여덟배쯤 편하게 잘 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너의 기억마저 없다면, 지금의 나에게 그 시절의 기억마저 없다면, 내가 과연 이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나는 분명 그 기억을 슬퍼했지만, 그 기억에 의지하며 많은 시간을 버텼다. 넌 내게 굉장한 기억을 선사했고, 비록 그 기억이 누구나 가질 법한 평범한 것이라도, 나는 그 기억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비록 슬픈 것이긴 하지만. 비록 해피엔딩은 되지 못했지만.


06.

이토록 지적이며 이토록 섬세하고 이토록 슬프면서 이토록 재미있는 영화를 본 적은 없었다. 어떤 영화는 굉장히 지적이고 어떤 영화는 굉장히 섬세하고 또 어떤 영화는 굉장히 슬프거나 재미있겠지만,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미덕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짐 캐리가 미남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건 몰랐고, 케이트 윈슬렛의 피부가 백옥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어여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는 줄은 몰랐다. 찰리 카우프만의 이야기가 엉뚱하며 신선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힘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 역시 정말 몰랐다.


07.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순수한 영혼의 영원한 햇빛. 비록 그 사랑은 끝나고 남은 것은 기억일 뿐이지만, 그것은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순수한 것이었으니- 난 이제 그 기억이 영원토록 내 마음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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