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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dancingufo 2006. 7. 19. 15:27

나는 원래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살면서 몇 권의 에세이를 읽어보았지만 (그 속엔 하루키의 에세이도 있었다.) 신경숙의 <아름다운 그늘>을 제외하곤 특별히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딱히 에세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취향이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신변잡기적인 글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런 내가 별다른 망설임없이 이 책을 주문했던 것은, 주위에 하루키의 에세이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고 그 중에서도 이 책이 단연 으뜸이라고 꼽는 사람도 있어 '어떤 책이기에...' 하는 궁금즘이 일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편향된 취향의 독서가(라고 표현해도 좋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이긴 하지만 그나마 가진 장점이라면, 다른 사람의 추천을 쉽게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이다.

500page가 살짝 넘는 이 책은, 일단 첫만남에서 두께로 나를 만족시켰다. (개인적으로 두꺼운 책을 매우 좋아한다. 물론 재미없으면서 두껍기만 한 책은 최악이다.) 그렇지만 한 100page가 넘어갈 때까지는 나는 이 책의 묘미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나는 하루키를 싫어하지도 않지만, 하루키의 몇몇 작품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팬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어찌보면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일상 따위, 내게는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다른 모든 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면서 신경숙의 에세이만은 좋아했던 것인지도.

게다가 이 책을 읽는 도중, 내가 책을 잠깐 다른 곳에 두고 온 탓에 중간에 다른 책을 읽어야 했고 때문에 흐름이 툭- 하고 끊겨 버렸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손에 들었을 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어떡할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그 때 나의 결정은 매우 옳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하루키식의 유머였을까. 딱히 웃기려고 든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몇몇 구절에서는 그 표현이 너무 웃겨 난 혼자 소리내어 웃곤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루키가 타고난 문장가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그런 문장력을 뽐내기보다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를 술술술 써나가고 있다. 난 몇몇 작가가 보여주는 훌륭한 문장들에 매우 심취하는 편이지만, 그런데도 이번엔 어쩐지 하루키의 그런 태도에 마음이 편해졌다. ...편안해진 것이다. 조용하게, 그냥 숨을 쉬는 것만으로 하루키의 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처음이다.

그리스인들의 돌담쌓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특별한 목적 없이 달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달리는 하루키를 불러세워 왜 그렇게 달리고 있는지 물어보는 그리스의 할머니도 재미있다. (이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달리기는 몸에 좋지 않고 포도주는 몸에 좋다.) 달리는 것뿐 아니라 어떤 것도 혼자서 잘 해내지 못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야기. 이탈리아의 기막힌 우편제도.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둑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 중 내가 매우 재미있게 읽은 일화가 두 가지 있는데 한 가지는 하루키가 101번 버스를 타고 크레타 섬에 있는 프라키아스로 갈 때의 일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오스트리아에 갔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올 때 승용차가 고장난 일이다.

중략과 중략을 거듭하며 이 두 일화를 잠깐 소개하자면,

[운전사가 어느 작은 마을에서 아는 사람한테 포도주를 한 병 받은 것이 소동의 발단이었다. - 중략 - 그 다음 마을에서 운전사는 또 버스를 세웠다. 이번에는 차장이 내려 치즈 만드는 집으로 들어가더니, 배구공만 한 크기의 둥근 치즈 덩어리를 사 가지고 왔다. 그런 식으로 버스 속에서 술판이 벌어진 것이다.
  제일 앞줄에 앉은 그리스 아주머니가 "이봐요, 기사 양반. 당신이 마시는 거, 그거 포도주지?" 하고 운전사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물이에요, 물." 운전사는 처음에는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머지 않아 "아주머니도 좀 마셔봐요."라며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치즈를 잘라서 아주머니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우리를 비롯한 승객 모두가 앞에 모여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치즈를 우물거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차장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사슴 가죽이라도 벗길 수 있을 만큼 예리한 나이프로 치즈를 잘라 승객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그 칼날 끝이 맨 앞에 앉아 있는 영국인 노부부의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그들은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어색한 미소를 띠며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 이제 운전사는 도로는 거의 보지도 않고 있다.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하며 하하하하 하고 있다. 길은 여전히 험악하고 구불구불 휘어 있다.
  그러나 그날 먹은 포도주와 치즈는 이번 여행에서 먹었던 어떤 치즈나 포도주보다 맛있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맛이 있었다. - 중략 - 아무튼 우리는 잔뜩 배가 부른 상태로 아기야 가리니에 무사히 도착했다. 승객들은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만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버스에 또 한 번 타고 싶기도 하고, 다시는 타고 싶지 않기도 한 복잡미묘한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 중략 -

  그런데 술판이 벌어졌던 이 101번 버스를 우리는 이틀 후 우연히 다시 타게 되었다. 차장은 달랐지만 운전사는 같은 사람이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중략 - 101번 버스에 대한 불길한 예감도 보란 듯이 적중했다. 버스가 한참 달리고 있는 도중에 짐칸 뚜겅이 열려(차장이 제대로 닫지 않은 것이다.) 안에 실었던 손님의 짐 두 개가 도로로 굴러 떨어졌다. - 중략 - 간신히 버스를 세우고 짐을 회수했다. 다행이다......라고 말해야 할 텐데 사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짐 두개가 모두 우리 것이었기 때문이다. - 중략 - 다른 방법이 없어 나는 차장에게 배낭에 뚫린 구멍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디 랭귀지로 말한다. 어떻게 할 거요, 구멍이 뚫렸다구요. 차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양팔을 벌린다. 그러고는 문을 가리킨다. 여기가 열려 있었어요. 어이, 이봐 그건 말 안 해도 알아. 그러니까 자네 탓이라는 거 아냐! 알겠어? 자네 잘못이라구. 나는 영어와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소리친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한들 시간낭비일 뿐이다. 길에서 만난 사슴에게 스페인어로 길을 묻는 것과 다름없다. "미안하지만 숲의 출구가 어느 쪽입니까?"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해도 결국 소용없는 일이다. 사슴에게 길을 묻는 내가 잘못이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냥 삼켜버린다. 그러고는 허무하게 고개를 젓는다. 차장도 똑같이 고개를 저으며 다독이듯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군, 이라는 듯이.
  그런 곳이 크레타 섬이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 산을 넘고 저 아래로 로잇데 마을이 보이는 지점에서 기어를 바꿨을 때 갑자기 엔진이 딱 멈췄다. - 중략 -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아내가 묻는다.
  "나도 몰라. 엔진에 점화가 안 돼."
  "갑자기 왜 그렇게 됐어?"
  "글쎄, 나도 모르겠어. 이런 일은 생길 수 없는데 말이야. - 중략 -"
  "그러니까 이탈리아의 차는 사지 않는 게 좋다고 했잖아.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일본 차나 독일 차를 샀어야 됐는데. 그럼 이렇게 황당한 일은 없었을 거 아냐." 하기야 그럴지도 모른다. 안전하게 폴크스바겐 골프를 샀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란치아를 살 때, 이탈리아 사람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 차는 피하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그런데 나는 호기심 때문에 이탈리아 차를 사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떤 차길래 그런가 하고. "이제 알겠지." 하고 아내는 말한다. "일요일 아침에 오스트리아의 산길에서 갑자기 엔진이 멈춰버리는 그런 차라는 걸 말이야."
  말할 것도 없이 아내는 상당히 화가 나 있다.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 중략 -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내는 그저 씩씩거리고만 있어도 되지만 남편은 해결책을 궁리해야만 한다. 그것이 세상사라고나 할까, 숙명인 것이다. 말해봐야 소용없지만 참으로 불공평한 숙명이다. - 한참 중략 -
  다음 날 아침(이 날도 또 비가 왔다.) 공장에 가보니 고맙게도 차는 제대로 고쳐져 있었다. - 중략 -
  "그러길래 좀 무리를 해서라도 벤츠를 샀어야 했어." 아내는 다시 투덜투덜 불평을 한다. "제발 그만 해. 벤츠는 땅 투기꾼이나 야구 선수들이 타는 거야." 하고 나는 말한다. (땅 투기 하는 아저씨들과 야구 선수 여러분, 미안합니다. 이건 그냥 농담한 겁니다. 직업 차별 같은 건 아닙니다. 벤츠는 누가 뭐래도 훌륭한 자동차입니다. 내가 이런 농담을 한 건 순전히 벤츠를 살 수 없어서 심통을 부린 것뿐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고장은 적잖아." 하고 아내가 말한다.
  "이 차도 이제는 고장 안 나. 어제는 정말 특수한 사고였다구. 몇 번씩이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이젠 괜찮아. 상태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까." 하고 내가 설명한다. 설명이라기보다는 아내에게 미움받는 덜 떨어진 내 친구에 대해 변명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글쎄 어떨지." 아내는 차갑게 말한다. 마치 가벼운 주술이라도 거는 것 같다. 그렇다. 아내가 대화의 마지막에 내뱉은 한마디는 대개의 경우 가벼운 저주인 것이다.

  그 날 오후 홀츠가우라는, 그림 엽서에 나올 것처럼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마을 근처를 달리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운전 패널에 브레이크 경고등이 켜졌다.  - 중략 -
  "오스트리아 자동차 수리공장 투어네." 아내는 차갑게 내뱉는다. "매사에 좋은 면을 보자."고 나는 말한다. "이런 경험은 독일 차를 타면 하기 힘들어. 고장 없는 차로 안전하게 여행해봐야 그저 효율적으로 호텔에서 호텔로 이동하는 것뿐이잖아. 이탈리아 차를 타고 사회 구석구석을 보고 다니자고."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다. - 중략 -
  아르벨슈베르데의 수리공장에 대해 특별히 쓸 말은 아무 것도 없다. (덧붙이자면 우리 차는 그 후에 6천 5백 킬로미터를 달린 시점에서, 어딘가 갑자기 나사가 빠지는 바람에 기어가 흔들거리게 되었다.]

여기까지다. 중략하지 않고 읽으면 더 재미있지만, 내용이 너무 길어 다 소개하는 것은 포기다. 어쨌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하루키 에세이가 어떤 것인지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 이 책을 다 읽었다, 라는 그 느낌이 참 마음에 든다. 재미있는 책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줘도 괜찮을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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