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도리스 레싱, 풀잎은 노래한다. 본문

피도 눈물도 없이

도리스 레싱, 풀잎은 노래한다.

dancingufo 2008. 10. 27. 01:50



아무리 도리스 레싱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데뷔작이니 그 훌륭함이 조금은 덜할 거라 생각했다. 원래 처녀작이라는 것은 신선하거나 흥미롭기는 해도 조금은 완성도가 덜하고 그래서 얼마쯤은 부족함이 느껴져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에 올해 내 최고의 소설은 분명히 도리스 레싱의 것이 되리라 생각하면서도 <풀잎은 노래한다>는 그저 미루어 두고만 있다가, 더이상은 집에 읽을 책이 남아있지 않아 드디어 이 책을 뽑아 들었는데.

그랬는데 정말, 도리스 레싱은 정말이지.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거기에 있다. 메리를 고통스럽게 만들던 그 더위처럼, 너무나도 뜨거워서 폭발해버릴 것 같은 기운이 <풀잎은 노래한다>를 지배한다. 그 열기 때문에 나는 괴롭고, 내내 긴장이 되거나, 또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으며,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단 한 순간도 편안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

끝없는 불안의 연속이다. 단 한 번 발을 삐끗한 것 같은데 그 후로 삶은 멈출 수 없는 속도로 무너져 내린다. 그리하여 사는 일은 더욱 두렵고,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게만 느껴진다. 제발 메리가 건강해지고, 제발 리처드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게 되길 바라보지만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결국 메리는 죽고 리처드는 미치며 모세는 살인자가 된다. 원하는 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허탈해지는데, 고작 지어낸 이야기 때문에 왜 내가 이토록 허탈함까지 느껴야 하는지 나도 잘 알 수 없다.

 

레싱의 이야기는 이야기에 집중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편이지만, 한 번 집중을 시작하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정신없이 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레싱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줄거리를 요약해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 어느 이야기도 평범하지 않다. 문장은 단호해서 힘이 느껴지며, 군더더기가 없어 깔끔하기도 하다. 또한 레싱은 치열하며, 열정적이고, 안주하지 않는 글을 쓴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의 글들을 이렇게 계속해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로 오랜만에, 경외시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들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가 아직까지도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바라는 것이라면 그저, 도리스 레싱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금까지처럼 멋진 글을 선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고 조금 더 많은 레싱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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