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9년 6월 1일, <런던 스타일의 책 읽기> 본문
요즘은 닉 혼비의 신작을 읽고 있다. <런던 스타일의 책읽기>라는 제목의 책인데, 매우 재미가 있다. 사실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에 관한 글을 읽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책읽기에 관한 글을 읽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책이 닉 혼비의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로 이 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나는 이 사람의 글을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고 그래서 이 책을 사길 매우 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닉 혼비의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이와 똑같은 내용의 글이라 해도 이 정도까지 재미있게 읽진 않았을 거라는 걸 인정한다. 원래 그런 것이다. 사람에게는 원래 취향이란 게 있고, 好不好란 게 있는데 닉 혼비는 나의 취향이고 나의 好이다. 그러니 이런 편파 판정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헝가리 작가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삼부작 소설(우리나라에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하나의 제목으로 엮여서 출판되었지만, 실은 각각의 책이 다소 긴 시간적 차이를 두고 발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삼부작으로 엮어서 읽어도 좋지만 따로 따로 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을 읽었는데, 이 작품은 올해 들어 지금까지 읽은 것 중에선 단연 최고로 꼽아도 좋을 만큼 훌륭했다.
요즘은 퇴근 후에 따로 할 일이 꽤 많아져 출퇴근길에 읽는 것 말고는 책을 읽을 시간을 통 내지 못하고 있는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너무나 훌륭해서 허기졌을 때 좋아하는 음식 급하게 먹어치우듯 엄청난 속도로 읽어냈다. 세상에 좋은 책은 아주 많고, 때로는 매우 재미있지 않아도 매우 좋다라고 느끼는 책도 있지만 이 책의 경우엔 너무나 재미있고 또한 너무 좋아서 '책을 이렇게까지 재미있게 읽은 것도 오랜만인 것 같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책의 세번째 이야기를 읽고 있을 때, 닉 혼비의 신작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주문한 지 하루만에 책을 받아서 얼른 읽어버리고 닉 혼비로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사실 <런던 스타일의 책읽기>보다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더 재미있다. 전자를 아직 1/3 정도밖에 읽지 않았으니 좀 섣부른 발언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이 책이 이렇게까지 재미있지 않았다면 요즘 같이 정신 없던 때 이 정도의 빠른 독서 속도는 내지 못했을 거라는 말이다.
최근에는 재미있고 마음에 드는 책을 연이어 읽고 있어서 기쁘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기 전전에는 <마사 퀘스트>를 읽었는데, 도리스 레싱의 작품 답게 이 책도 아주 훌륭했다. 물론 그 다음에 읽은 <더 리더-책을 읽어주는 남자>는 기대 이하였지만. (역시 여담이지만, <마사 퀘스트>는 5부작 소설인데 우리나라에는 첫 번째 이야기만 번역되어 나와 있다. 민음사에서 내는 세계 명작 시리즈에서 나온 책인데, 대체 1부만 내고 나머지를 내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나로서는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여 민음사 홈페이지에 의견을 남겨볼까 하고 들어가 보았더니 그럴만한 게시판을 찾을 수 없었다. 전화라도 해서 문의를 해야겠다고 생각 중인데, 독자가 이런 문의를 하기 전에 당연히 출판사에서 나머지 작품들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조금 답답해 하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닉 혼비는 '내 인생을 더 낫게 바꾸어준 사람들' 목록에서 아르센 웽거(잉글랜드 축구팀 아스날의 감독이다.)가 8등 정도를 차지할 거라고 말했는데 내 인생을 더 낫게 바꾸어준 것 목록에서의 1위는 역시 책일 거란 생각이 든다. (만약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를 꼽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라울 곤잘레스가 한 3위쯤 될 것 같다. 물론 1위나 2위는 절대 축구 선수가 아닐 거라 믿는다.)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거나 적거나 할 정신적 여유도 없었고, 덕분에 일을 제때제때 해내지 못해 업무도 꽤 밀린 상태인데, 최근 읽고 있는 책이 유쾌한 쪽이다보니 조금 위로를 받고 있다. 어릴 때는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다보면 재미가 있어서 또 다른 책을 읽고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걸 가지게 됐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어느 정도를, 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건 많이 사라졌다. 그런 이유로 해서 예전보다 책을 덜 읽게 된 것은 아니고, 다만 책이 그냥 순수하게 재미가 있어졌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재미를 되찾은 것 같아서, 조금 기쁘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재미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단 한 번도 내게 책을 읽으라고 말한 적 없는 엄마에겐 고맙다. 어린 시절,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매우 엉망진창이었던 내가 그래도 이 정도로 자란 건 책읽기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와 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책을 읽어야겠지.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다. 사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오랜만에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일기를 쓰고 싶었던 것도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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