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아무도 모른다/2006.01 ~ 2006.12 (234)
청춘
명이 만나기 시작한 지 백일 된 제 애인의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첸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 겨를도 없이 첸의 둥그런 어깨와 겁먹은 눈동자가 눈 앞에 어른거린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아직도 첸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첸의 기억이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 역시 말이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했다. 기억이 기억을 덮어가고 있어. 사막 위의 모래가 다른 모래에 덮혀 사라지듯이. 얘기를 하는 그는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달래줄 수도 없고 함께 웃을 수도 없어, 그저 그를 안은 채 얘기를 했다. 이 기억이 사라져가는 그 기억보다 따뜻할 거야. 그렇지만 그는 내 말을 믿지 ..
손이 붓는다는 느낌이 든다. 꼭꼭 손을 주물러준다. 몸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가 꼭꼭 몸 밖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신기하다. 몸은 참 정직한 존재인 것이다. 마음처럼 변덕을 부리거나, 진실을 숨기거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그러한 이 몸에 비중을 두는 삶이 어쩌면 더 나을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들도 하나의 폭력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폭력 말이다. 무언가 다른 것이 존재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사람을 고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좀 더 빨리 잊고, 좀 더 많이 웃고, 좀 더 쉽게 진실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 이런 것은 그냥 히스테리라고 하자. 모두에게 침을 뱉고 싶은 이런 기분은 말이다...
01. 좋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였던가. 왜? 라고 생각했어. 그냥 좋아합니다, 라든가 나를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따위의 말이라면 쉽게 이해했을 것 같아. 그런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건 어떤 건지 잘 몰라. 이것은 연애라든가 이성교제 같은 문제가 아니야. 어쩐지 나는 그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지금 이건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래. 그래서 그런 말은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는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조금 당황한 건지도 말라. 나는 이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어.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아. 그런 것은, 눈을 마주보면서 알게 되는 일이잖아. 02. 아직 못읽고 꽂아둔 책들도 꽤 있으니까, 한 달에 한번씩만 주문을 하자고 생각했..
01.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싫다고 생각했다. 허세를 부리거나, 힘으로 서열을 지으려고 하는 특성같은 것말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별로 값어치 없어보였다. 아주 좋아하거나 가깝게 지낸 남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무관심하거나 비웃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많은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싫어진다. 다른 사람에 대해 수군대길 좋아하는 점이나, 무리 안에서 결속감을 가지려 하고 그 외의 구성원은 배척하려고 드는 태도같은 것. 삶이 버거우면 의지를 하려고 하는 점이나 결혼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 어리석음도 싫다. 결국은 대부분의 여자들도 값어치가 없어보이기 시작했다. 살수록 독불장군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남자가 아닌 것을 긍정하는 편이지만, 내..
사람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선택의 순간이 있다. 나는 이 마음을 돌릴 것인가 말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한다. 때로는 나도 놀랄 만큼 존재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진저리가 나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마음처럼 그렇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마음 역시 힘이 들다. 세상에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이 어디 흔하겠냐고 생각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좋은 사람 역시 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 한 끝 차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거기서 거기다. 그 속에 나와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대체 어떤 사람과 어울리겠다는 걸까? 마음을 달랠 것이 많지 않다. 노래를 듣거나 책을 좀 더 읽어야겠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건 너무 고집스러운 태도인 걸까. 사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태도인 걸까. 그렇다해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한다거나, 나를 좋아한다고 결론 내린 내 판단은 틀리고 만다. 내가 다시 그러면 그렇지, 라고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싫다. 알고보니 나 너무 이상적인 관계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01. TV를 보지 않으니까, 거실에 나갈 일이 없었는데 월드컵이 시작된 후 매일매일 거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우리 거실이 얼마나 지저분한지도 알게 되었고, TV뒤로 뿌옇게 쌓인 먼지도 눈에 보였다. 결국 하프타임 때마다 거실을 닦게 됐는데 그걸 매일 해도 매일 걸레가 지저분한 게 신기하다. 매일 매일 그렇게 검게 닦여 나오는 먼지를 보고 있자니, 정말로 사람 사는 일은 이렇게 더럽고 지저분한 걸까- 란 생각이 든다. 02.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스포츠 경기를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남들 슬프다는 영화 보고는 웃어대서 오히려 욕을 먹는데, 스포츠 경기를 보다보면 이상하게 자꾸 코끝이 매웠다. 한참 농구를 좋아할 때 정작 본인은 기아를 응원했으면서 연세대가 삼성을 만나 지는 걸 보고..
01. 코트디부아르. 너무 멋진 경기였다. 휘슬이 울리는데 괜히 눈물이 다 났다. 드록바라니, 별로 좋아하는 타입이 아닌데 오늘은 너무 멋있구나. 저런 모습이라면 어쩐지 경기에 져도 패배자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축구란 게, 이렇게 재밌기도 하고 이렇게 씁쓸하기도 하다. 조별 예선 경기가 끝나고 귀국한 저 선수들이, 자기 나라의 축구팬들에게 많이 칭찬받고 많이 격려받고 그랬으면 좋겠다. 02. 그나저나, 이 케즈만 바보자식. 그런 데서 퇴장이나 당하고 말이다. 예전에, 그냥 케즈만이 다리가 길어서 그랬을까. 김은중 생각을 많이 했었다. 어쩌면 그냥 스트라이커란 스트라이커는 죄다 김은중 같았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어느 누구를 봐도 김은중 같진 않다. 그래도, 김은중 같지 않아도 난 케즈만..
6월이 절반이나 지나갔는데 아직도 저녁이면 서늘하다. 혼자 거실에 앉아 있노라면 어쩐지 자꾸 비가 내리던 길을 걸어, 방금 집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냄새를 맡으면 공기에 빗방울이 스며있다. 습도가 높아지려나보다. 함께 마음도 물기에 젖는다.
그 사람의 학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지적인 사람을 좋아하고 지적인 남자와 만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 지적이라는 것이 학벌의 높고 낮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을 내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배울 것이 있고,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을 원하는 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쉽게 만날 수 없다해도, 대충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기를 보다가 결국은 너무 답답해졌다. 대한민국의 16강도 중요하지만 이 월드컵은 지주의 마지막 월드컵 아닌가. 어차피 대한민국이 우승을 못할 것이라면, 라울이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없다면, 지단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랐다. 지단은 내게 팀에 있어 중심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준 선수이고, 축구에 있어 영웅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선수이고, 어떤 상황에서든 이 선수라면 무엇이라도 해줄 거라는 믿음을 알려준 선수이다. 나는 지단을 통해서 선수가 마법 같은 플레이를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가장 좋아한 선수도 아니고 특별히 애닳아하지도 않았지만- 오래된 축구팬들에게 마라도나나 펠레 같은 영웅을 보았다는 것이 추억이나 자랑거리라면 나에겐 지단이 그러했다. 나는 이 선수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달리다가, 얀 콜러의 무릎이 돌아갔다. 자신은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 첫 골을 넣었고, 그 후로도 동료의 추가골이 있어서 팀은 전반전에 이미 2-0으로 기분좋은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특별히 심한 태클을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디딤발을 잘못 놓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그냥 그렇게 되었다. 넘어지며 무릎이 돌아갔고, 그 순간 고통스러운 듯 팔을 치켜 들었던 얀 콜러는 그대로 들것에 실려나가 더 이상 경기를 뛰지 못했다. 얼마 후 다리를 절뚝이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얀 콜러가 보였고 그 모습을 보면서 한준희씨는 저렇게 급하게 경기장을 빠져 나가야 하는 것 보니 보통 부상은 아니겠다 이야기했다. 체코에 대해서도, 얀 콜러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지만 네드베드가 처음으..
01. 축구를 보고 있다. 축구를 보다보면 때때로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기쁨과 탄식과 눈물에 얼룩지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해지곤 한다. 이깟 공놀이 하나에 마음을 뺏긴 나를 비웃기도 하고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축구를 보고 있다. 그러다보면 어쩐지 이것이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의미인 것처럼 느껴진다. 02. 대전에 다시 돌아오길 바라기도 하고, 다른 곳에 있더라도 대전을 홈그라운드로 여겨주길 바라기도 하고, 득점왕에 올라주길 바라기도 하고, 나를 계속 기억해주길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무엇보다도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대한민국 최고의 김은중이 되는 것이다. 바라고 있다. 간절하게. 대한민국 최고의 김은중이 되라고.
01. 오늘따라, 너무 심심해. 심심하니까 우울해져. 우울해서 흥이 나지 않아.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 거야. 투덜투덜. 오늘의 나는 내가 싫어하고 꼴사나워하는 종류의 인간들과 닮았네. 02. 왜, 왜, 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곧이 곧대로 듣기보다는 아니라고 말하고 아닐 거라고 말하고 아닌 이유에 대해 말하는 걸까. 나는 고집을 부리고 싶어. 내 말은 다 옳아. 그리고 누군가는 그냥 좀 들어주면 좋겠어. 03. 이런 곱지 않은 성격으로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얼마나 숱하게 짜증나게 한 걸까. 그래, 가끔 흉한 꼴도 보이고 듣기 싫은 말도 던지고 그러는 것이 관계라고는 하지만. 그렇지만. 04. 진실에 대한 집착은 때때로 무서워.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각자의 몫으..
투정부리고 싶지 않은데, 투정을 부리게 돼.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다가도, 금세 다시 침울해져. 물론 반쯤은 장난처럼 사랑한다는 말같은 걸 남발하고 있지만.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나한테는 네가 최고의 선수인 것도 사실이야. 많이 특별하게 생각했고, 나에게 있어서의 대전 시티즌에는 너의 비중이 너무 컸어. 한동안은 너만 봤던 나니까. 너 때문이라면 대전조차도 원망하고 탓할 수 있었던 게 나니까. 나는 꽤나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고, 한 번 좋아하면 마음이 잘 돌아서지지가 않아.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싶거든. 나도 너를, 예전에는 좋았지만 이제는 남의 것이 된 선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게 안 된다면, 네가 있는 ..
하트 에이스의 의미는, 가장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것. 대전은 승리했고, 김은중은 골을 넣었다. 이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결과였다는 것을, 하루가 다 지나간 후에야 인정하고 있다. 앞으로의 많은 리그 데이가 오늘만 같아라.
그냥 있어. 그 후의 시간은 늘 그랬던 것도 같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그냥 있어야 했지. 울지도 않았어, 난. 노력 따위 하고 싶지 않았지. 나는 그냥 있었어. 그렇게 있다보니 시간이 흘렀고. 시간이 지난 후에 그대로의 내가, 아직도 거기 있었어. 그래서 무서웠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하지만 나 외의 모든 것은 놀랍도록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나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겠지. 지금의 이 시간에는 내가 없다고 생각해. 난 거기 그냥 있었으니까. 아마 알아볼 수 없을 거야. 시간이 달라졌어. 같은 시간 안에는 없게 되었지. 난 아무것도 안 해서, 우는 것도 잊는 것도 안 해서, 그냥 거기에 있었어. 그 시간에 남겨졌어. 다른 사람을 좋아해. 그렇게 하라고..
01. 타로 올해의 내 카드는 황제이고, 황제는 요정 왕국의 지배자이다. 이 요정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질서를 부여할 것을 알리는 존재라고 한다. 지치고 힘들지라도 도식적인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 성격 카드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황후이다. 이 카드는 78장의 카드 중 가장 예쁘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처음부터 내 눈을 사로잡은 카드이다. 황후는 황제의 아내이며, 다른 요정의 삶에 커다란 힘을 행사한다. 예쁜 왕관과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뛰어난 요정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 이 카드가 내 성격 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기분이 좋았던 것은, 카드 속 황후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아주 엄격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척 크고 어여쁜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바람이 분다, 라거나. 소년은 울지 않는다. 소년, 열일곱. A better day. 거짓말같은 시간. Please. 괜찮아, 울지마.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마음이 슬퍼서 문득 생각이 났네.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소년과 소녀는 모두 다.
계속해서, 선택 앞에 놓인 것이다. 누구라도 산다는 건 그런 식일 것이다. 내 의지대로- 였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휩쓸린 기억이 있다고 해도, 원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강요받은 적도 없고 원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당한 적도 없으니. 그것으로 괜찮다. 스물 여덟해는 고스란히 내 것으로 남았다.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하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미 내가 그 태도를 어느 정도까지는 선택했다고 믿는다. 어떻게 믿음에 흔들림이 없을 수 있겠냐고. 이렇게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선택이 달라질 리 없다. 그것을 믿고 가면 될 것 같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최소한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