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빈 집 본문
악어. 파란 대문. 수취인 불명. 섬. 나쁜 남자. 해안선. 나는 김기덕의 치열함이 마음에 들었다. 특별히 그의 영화에 공감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그의 신작들에 손길을 뻗쳤던 건 그가 영화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치열함이 마음에 들었던 탓이다.
시퍼런 가시가 살아있고, 손에 닿으면 목숨도 뺏을 듯한 독이 서렸다. 그래서 슬금슬금 피해가는 사람들 때문에 슬프고, 그 슬픔을 위로받기 위해서 악을 쓴다. 김기덕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상상. 김기덕은 늘 싸웠다. 나는 어느 쪽의 편도 아니었지만 김기덕이 계속 영화를 만들어 나가길 바랬다. 굳이 변하거나 타협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영화를 보여주길 바랬다. 그러니까 중립적인 지지자였다고 해두자.
그런데 이제 김기덕은 그 시퍼런 가시를 잘라내기로 했나보다. 한결 세련되게 다듬어진 영상들과, 순간순간에 맞게 흘러나오는 장중한 음악이라니. 야생동물이었던 김기덕은 이제 집으로 들어와 사는 쪽을 택했다. 그런 것들이 어디 영화인으로서의 치열함을 꺾어버렸겠냐마는, 과거지향적인 관객인 나는 그 펄펄하게 살아있던 김기덕의 악이 그립다. 김기덕은 타협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싸우는 것에는 이제 지친 모양이다.
[빈 집]에는 선화가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역시 선화가 살았으며, [나쁜 남자]의 그녀도 선화였다.) 선화는 여전히 남자의 폭력 앞에 놓여 있다. 색다른 점은, 이번에는 그녀를 구원하는 것 역시 남자라는 점이다. 여태까지 김기덕 영화에서는 한번도, 남자가 여자를 구원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선화를 구원하는 그 남자는, 진짜 남자가 아니다. 그것은 선화의 꿈이나 바람일 지도 모른다. 또한 어쩌면 선화 역시 구원 받은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선화와 그 남자의 몸무게는 합해서 제로. 두 사람 다 체중을 가지지 않은, 이 세상에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선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린 (즉, 죽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어느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는 말로 끝을 맺지만, 이 마지막 자막과 영화 사이에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김기덕은 결국 하고자 했던 얘기를 '말(자막)'로써 끝냈다. 그리고 그 '말'은 영화 속에 녹아들지 못했으므로 '영화의 일부분'이 되지 못하고 그저 '말'로써만 겉돈다. (사실 영상으로써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었다면, 마지막 자막을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 된다.)
이 영화가 국제 시상식에서 호평을 받은 이후, 정성일씨는 마치 김기덕의 수준 높은 영화를 한국의 비평가들이나 영화팬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때문에 여지까지 쓸데없는 비난이 주를 이루었던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김기덕이 직설적으로 대놓고 영화를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가 김기덕에게 냉랭하다면, 그건 한국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내재해 있다는 증거라는 게 김기덕 자신과 정성일의 논리.
하지만 그간의 영화들과 [빈 집]까지 훑어봤을 때, 김기덕은 과정에 있는 감독이지 완성된 작가가 아니다. 김기덕이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일 순 있겠지만, 옳은 감독일 순 없다. (만약에 김기덕이 옳은 감독이라면, 김기덕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비평가들과 영화팬들은 틀린 것이 되어야 하므로) 그런데 은연중에 김기덕은(그리고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한 비평가는) 자신이 옳다고 말해버렸다. 두 사람의 논리대로 하자면 [빈 집]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는, 심각한 문제가 내재해 있는 사회. 즉 문제가 없는 사회라면 [빈 집]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감독은 영화로 얘기를 해야지 말로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말로 영화를 설명하려 들어서는 안 되며, 말이 영화를 설명해줄 수도 없다. [빈 집]과, [빈 집] 이후의 김기덕의 태도는 그런 이유에서 나에게 씁쓸함을 안긴다.
국제 영화제에서의 감독상 수상으로 한껏 자신감이 고조되었던 탓일 수도 있으니, 얼른 부푼 가슴에서 바람을 빼고 제 자리를 찾기를. 영화속에서는 자꾸 대사가 사라지는데, 정작 영화 밖에서 말이 떠돌아서야 감독 자신이 얘기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란 말에 동의할 수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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