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주홍글씨 본문
이번엔, 주홍 글씨를 새겨야 할 사람이 남자다. 하지만 죽고 사라지고 죄를 짓고 더렵혀지는 것은 여자다. 남자는 살아남아 다시 또 총을 겨누고 여자들을 거느릴 것이다. 그는, 아내의 더러운 과거를 봤고 애인의 추잡한 죽음을 보았지만 그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몸에 새겨진 주홍글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 주홍글씨가 숨겨야 할 죄악의 표식이 되는 것은, 그것이 여자의 몸에 새겨졌을 때 뿐이다.
이 영화가 싫다. 재미가 없고 어수룩하며 산만하다. 또한, 이 영화가 싫다. 사회적인 2류를, 어떠한 이해나 고민도 없이 무책임하게 끌어와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내가 좋아했던, 그리고 꽤나 그 역을 멋드러지게 소화해 낸 한석규가 있고, 데뷔작에서는 내가 분명히 박수를 보냈던 변혁이 있고, 나름대로 영화를 선택하는 눈에 한해서만은 인정을 해주고 싶었던 이은주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싫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고 본다. 엄지원과 이은주를 사랑하는 사이로 만든 것은, 어떻게 하면 이 영화에 '반전'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찾은 하나의 '탈출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사랑'이나 '고통'에 대해 감독이 주의를 기울었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다. 그녀들은 스스로의 사랑 따위 쉽게 잊어버리고 한 남자의 아내와 애인으로 머물렀을 뿐이다. 그녀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난 후에도 '수현'이나 '가희'라는 그녀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 것은 처음부터 그녀들에게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영화는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다 못 했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련한 부수적인 장치들에 대해 감독이 너무 무책임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그 얘기에 대해 동조하느냐 동조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 다음 문제다.)
순종적인 아내, 매력적인 애인, 먼저 유혹을 해오는 여자는 남자의 완벽한 판타지며 그들은 몰락하는 순간에도 완벽하게 남자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 한석규와 이은주. 불륜관계에 있던 두 사람 중 죄값을 치르며 죽어간 것은 여자이다. 둘의 관계에 있어서 한석규가 단순히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면, 이은주는 분명 사랑을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둘. 한석규와 엄지원. 한석규의 죄를 벌할 권리가 있는 엄지원은 그렇지만 알고 보니 한석규를 속이고, 한석규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했던, 게다가 불순하기까지 한 동성애자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한석규를 벌할 권리가 없으며, 한석규는 그녀에게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다. 남편이 살해당한 불쌍한 여인인 줄 알았던 사진관 여자는, 대낮에 남편의 머리를 박살낸 살인자에 지나지 않으며, 때문에 그녀와의 환상적인 섹스신을 상상했던 '죄' 정도는 '죄'라고 불리기도 뭣하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환상적인 행복을 주다가, 남자를 환상적으로 자유롭게 놓아준다. 멋진 결말이다. 이로써 남자는 제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 따위 아랑곳 않고 또 다시 제 총을 자랑하며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겠지.
그나마 영화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이중구조'라도 전작만큼의 수준이 되었다면 내용이 내 마음에 들었든 아니 들었던 칭찬할 만한 구석을 찾아보았겠지만 그것마저 해내지 못했다는 데 안쓰러운 생각마저 든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했든 그렇지 못했든 나는 변혁이 만들어냈던 '인터뷰'를, '인터뷰'속의 그녀를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한다고 해서 모든 감독이 기대에 부응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영화.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앞으로 '변혁'이란 이름에 새겨질 주홍글씨가 될 것이다.
* 아,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사실 하나 더. 포스터에의 영화 문구는 틀린 맞춤법으로 찍혀 나왔다. [댓가]가 아니라 [대가]라고 되어야 하겠지. 영화를 홍보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보편적인 수단이 포스터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포스터에 맞춤법이 틀린 글자가 떡하니 올라가 있는지. 저 글자가 틀렸다는 걸 알아챌 사람이, 저 영화의 관계자 중 아무도 없었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얼마나 영화에 신경을 안 쓴 거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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