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5년 7월 16일, 벌레 본문
01.
벌레가 한 마리 돌아다닌다. 발이 여러개 달린 벌레이다. 발이 많아서 그런 건지 무척 빠르다. 쳐다보고 있는데 머리가 어지럽다. 확실히 발이 많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혐오감을 준다. 그렇지만 어쩐지 약을 뿌린다거나 책으로 때려서 죽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는 지금 무섭거나 징그러운 대상을 무찌르는 것마저 하기 싫을 만큼 모든 것이 귀찮은 상태인 것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만연해있는 것이 바로 귀차니즘이라더니, 이러니 저러니해도 역시 나도 요즘 사람이 맞는 모양이다.
02.
오랜만에 친구와 나란히 앉아서 TV를 본다. 중국에 있을 땐 자주 보던 프로인데 한국에 온 이후로는 처음 보는 듯 하다. 저 프로가 아직도 하고 있구나- 싶어서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신화는 참 멋지다.
프로에 출연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세 사람을 뺀, 신혜성과 전진과 앤디지만 그래도 역시 신화는 멋지다. 뾰루퉁하고 새침하고 그래서 나보다 더 여성스러워 보이는 신혜성은 재미있어서 좋다. 전진은 매력적인 데라곤 없지만 그래도 뛰어난 운동 신경을 발휘할 때 만큼은 확실히 멋지다. 앤디는 외모나 행동이나 가수로서의 소질까지 인정할 게 없지만 일단 신화니까 봐준다. 토요일 저녁에 친구와 나란히 앉아서 히히흐흐호호거리며 신화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 평화로워진다. 친구가 수박을 잘라다주고 나는 수박씨를 툭툭 뱉어가며 TV를 보고 있다. 우울해지지 말자고 생각한다. 특별히 나쁜 것은 없다. 그러니까 즐겁진 않더라도 최소한 우울해지지는 말자.
03.
기름기를 적당히 뺀 피자가 맛나듯이, 크림을 적당히 들어낸 까푸치노가 맛나듯이, 친밀함을 적당히 뺀 관계가 좋다. 덜 친밀하다고 해서 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쪽이 나에게 더 잘 맞을 뿐이다. 타인을 설득할 생각 같은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에 수정의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끝나버린다. 그런 사랑에 목숨까지 걸고 있다간, 정말로 내게 주어진 삶을 마무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04.
벌레가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은 침대에 누우면 정면으로 보이는 천장. 발이 많으니까 든든하게 천장을 붙잡고 있어서 내가 자는 사이 내 위로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부디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벌레든, 무엇과의 동침은 불편하고 낯설며 부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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