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2008년 7월 14일, 이 맛에 축구 본다. 본문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어쩐지 오늘 우리가 이길 것 같다는 생각.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피식 혼자 웃었다.
그렇게 속고 또 속고도 여전히 다시 속는 내가 우스웠던 탓이다.
J엄마를 만나자마자 '오늘 이길 것 같아.'라고 말을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J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7년이나 속았으면서 바보같이 또 속냐는 J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오늘 우리가 이길 것 같다는 내 말도 그저 즐겁자고 한 말만은 아니었는 걸.
사실 경기가 있기 전날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예전같으면 수원 정도야 뭐 가뿐히- 라고 생각했겠지만
지난해 봄 우리가 당했던 2연패는 꽤나 충격적이어서 더는 그런 농담은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래도 우리가 이겨!'라는 얘기를 듣고도
'왜 이래. 우리가 이길 거야!'라고 장난으로라도 반박하지 못했는데,
아침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흐음, 왠지 오늘 우리가 이길 것 같지 않니? 라는 생각.
그래,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침부터 대전 써포팅곡들을 모아놓은 CD도 틀어놓고.
흥겹게 랄랄랄~ 거렸는데.
대전으로 내려가던 버스 안에서 메모리칩을 잃어버렸다.
메모리칩이 뭐냐 묻는 말에 보여주려고 카메라에서 꺼내다가 그 자리에서 툭, 하고 떨어뜨렸는데
거참, 이런 걸 두고 귀신이 곡한다고 하는 것인지
내 두 눈으로 떨어지는 걸 분명히 보았음에도 아무리 찾아도 메모리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메모리칩 용량이 부족해 하나 더 사려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는 바보. 멍청이.
그런데 우스운 건, 그렇게 하고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려던 버스는 매진되어서 30분을 더 기다리고
동영상을 찍어오려던 메모리칩은 눈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저녁을 먹으러 차를 타고 가다가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라 가던 길을 다시 돌아오고
그래서 다른 메뉴로 저녁을 해결하면서 보니 시간이 너무 급해 정신 없이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고
결국 킥 오프 1분 전에야 경기장 안에 들어가는 난리법석을 펼치고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꽤 기분이 좋았다.
사실 메모리칩을 잃어버렸을 때, 생각을 했다.
자, 내가 액땜했으니 우리는 이기자고.
물론 액땜 같은 것 자주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이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왠지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내가 한두 번쯤 곤란을 겪으면
이 대가로 대전이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바보같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원래, 축구팬들은 다 제 팀 앞에서 바보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어쩔 수가 없다.
대전 시티즌은 나의 팀이고, 나는 이 팀 앞에서 여전히 바보다.
많이 뛰었다. 열심히 뛰어주었고,
늘 이 정도로만 해준다면 내가 이 팀에 지칠 일도 줄어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늘 이렇게 달려준다 해도 분명히 언젠가는 패배하고 누군가에게는 패배하겠지만.
세상엔 그냥 패배가 있고, 치명적인 패배가 있고, 정말로 만나고 싶지 않은 패배가 있다.
그리고 세상엔 승리가 있고, 결정적인 승리가 있고, 진심으로 만나고 싶었던 승리가 있어,
이 승리는 세 번째의 것이다.
진심으로 만나고 싶었던 승리.
정말로 패배를 만나기는 싫었던 순간에 얻은 승리.
원래 내 예감은 적중률이 높다.
난 기민하고 난 예측해내니까.
조금 지쳐 있었는데, 다시 힘을 내게 도와줘서 고맙다.
그렇게 웃고 있어서 고맙고, 즐겁고, 많이 좋아하고 있어, 당신들.
우리와 같이 우리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당신들.
하하하- 웃고, 까르르르- 웃고, 랄랄랄- 웃으면서 생각을 했다.
나는 이 맛에 축구를 본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지겹고 때로는 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역시 이 맛에 축구를 볼 수밖에 없다.
이 맛, 그래 진정한 축구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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