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피도 눈물도 없이 (250)
청춘
01.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왔다가 물러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을 열고 찾아온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문을 열고, 어이 잠깐만 기다려줘, 한 가지 얘기 안 한 게 있다구, 라고 외친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안에는 벌써 한 계절이 의자에 자리잡고 앉아,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만약 잊고 얘기 못한 게 있다면, 이라고 그는 말한다, 내가 들어주지, 잘하면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됐어,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까. 바람 소리만 사방 가득하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한 계절이 죽었을 뿐이다.] 02. ["외롭지 않아요?" "익숙해졌어. 훈련으로." "어떤 훈련?" "나는 좀 특별한 별자리에 태어났어. 즉 말이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
01. [낭비는 범죄다. 꼭 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타인의 에너지만 낭비시킬 뿐이다.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이 음악을 하고, 음악과는 정말 손톱에 때만큼도 인연이 없는 놈들이 그 CD를 사고 그 콘서트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다니, 재능이란 것은 위기감으로 지탱되는 의지가 아닌가. 그것은 왠지 하루하루가 지겹다고 24회 할부로 YS99를 사볼까 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의 거대한 낭비였다. 그 속에서 뭔가가 태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낭비가 아니라, 낭비라는 것도 모르고 무조건 행동하는 낭비이므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건 낭비도 아니다. 눈속임이다.] 02. [불안해 죽겠어?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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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잠깐 서울을 다녀간 친구는,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면서 내 방에 류의 책 두 권을 놓고 갔다. 나는 그 두 권의 책을 책장 위에 고이 올려놓은 채 석달을 보냈다. 그 동안 나는 마저 다 읽지 못했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얇은 두께의 책 두권을 읽고, 사무실을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은 영화 잡지들로 때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는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져갔지만, 매일매일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면서 눈에 띄는 그 두 권의 책은 이상하게도 좀처럼 내 손에 와서 잡힐 기회가 없었다. 나는 그저 잠깐, 아주 잠깐씩 그 책들을 들춰보다가 다시 제자리에 가만히 놓아둘 뿐이었다. 이상했다. 기분이 그랬다. 책의 첫장을 펼치기 전부터, 나는 그 두 권의 책에 거부감 ..
01. 이 책은 동화책이다. 초등학교 5학년만 되어도 동화책을 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다. 아직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데미안]이니 [여자의 일생]이니 읽어서 이해도 못할 책들을 손에 쥐기 시작했던 나 역시 동화책을 읽어본 기억은 거의 없다. 아마 [미운 오리 새끼]나 [개구리 왕자] 정도가 내가 '정독'한 동화책의 전부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던 내가 스물 여섯이나 되어서 동화에 속하는 이 책을 손에 쥐게 된 것은 당시 내가 가르치던 녀석들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 그 때 내가 가르치던 녀석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같은 거였고 나는 녀석들 중 대부분의 아이들이 읽었을 이 책을 나 역시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하여 잠깐 한국에 들어갔다 온다는 지인에게..
01.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는 그저 재미있는 제목이라 생각을 했다. 눈에 띄는 제목이지만 어쩐지 읽고 싶어지는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책의 표지도, 작가도, 책의 두께도 모두 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마주친 김은중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그 등을 보면서 어쩐지 내 발을 들어 세게 그 등짝을 차주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다. 크고 든든하고 솔직한 그 등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나를 심술궂게 만들었다. 나는 그 등짝을 찰싹- 하고 소리나게 한 대 쳐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등짝에, 새빨간 손자국이나 발자국을 문신처럼 남겨주고 싶었다. 내가 이 책을 이번 휴가를 함께할 도서로 선정한 것은, 바로 그러한..
01. 남자는 해변가에서, 낯선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혼동한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남자는 경악한다. 이런 남자를 두고 밀란 쿤데라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얼마나 큽니까. 만약 그 차이가 크다면 어떻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당신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지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존재가 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도, 그가 아닌 타인도 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 이유가 되든 각각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체성이란 것이 그다지 독특하거나 특별날 것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장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 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 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이것은 전혜린이 이 세상에 남긴 최후의 편지가 되었다. 2~3년 전에 문득 깨닫게 된 것이지만,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언제나 스스로의 마음이다. 그녀가 삶을 그만두는 순간까지 느꼈을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세상이나 타인이 그녀에게 준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이 생산하는 기쁨이나 슬픔으로 삶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기쁨이나 슬픔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히키고모리(ひきこもり). 어쩐지 그 발음만으로도 쓸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편견이나 선입관일 것이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나는 이런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의 마지막 가족]의 ‘히데키’가 히키고모리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다. 나는 히데키를 통해서 히키고모리를 만난다. 그리고 히데키는 내게, 쓸쓸하고 서글픈 이미지의 히키고모리를 남긴다. 류는 시원하고 매끄럽게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나는 몇번이나 책을 덮었다 펴고 다시 덮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이 소설은 어쩐지 고통스럽다. 방 안에 틀어박힌 히데키가 창문에 바른 검은 종이로부터 직경 십 센티미터의 둥근 구멍을 내고 있다. 히데키는 방에만 틀어박혀 지낸 지 일년 반이 지났고, 외출해서 타인과 접촉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을 바..
비가 내린다. 지난 달에도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왔을 때 비가 내렸다. 손에는 바로 그 지난 달, 대학로에서 샀던 분홍색 우산을 들고 있다. 비 내리네, 많이 오나봐,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고생들을 뒤로 하고 우산을 편다. 우산은 크지 않지만, 친구와 내가 나란히 비를 피할 만큼의 크기는 된다. 오늘도 비가 내리네- 훌쩍이고 난 후 아무런 말이 없는 친구에게 괜스레 말을 걸어본다. 연극을 보기 전까지 나는 매우 우울했다. 연극을 보고 난 후, 다른 생각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우울했던 기억을 잊어버린다. 나는 문학에 매혹된 후, 언어를 경외시하게 된 경험이 있다. 비비안 베어링과는 반대의 순서다. 하지만 어쨌든 언어에 매력을 느낀 후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그녀는 문학에 매료되어 국문학을 전공한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