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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이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남자 영웅들을 보면 이상하게 이 시대의 마초들이 떠오른다. 많은 여자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마초들을 혐오하고 하여 오디세우스라니- 별로 감명 깊지 않다. 그런데도 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웬만하면 보다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잊었던 것. 희미하게 생각이 났어. 삶의 기미같은 것이라 했지. 이 사람의 글 때문에 아마 난 마음이 먹먹했을 거야. 그 때는 열 여덟이었고, 자주 울었지. 견딜 수가 없어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고는 했어. 많이 슬펐어. 외롭거나, 아니라면 쓸쓸했던 거야. 내가 변하듯이 이 사람의 글도 변해. 그런데도 여전히 내 심장은 이 사람의 글을 기억하고 있지. 나는 잃고 살았어. 아니 잊지 않았어.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랬는 줄 알아? 나는 늘 생각해왔다고. 한결 같았어. 그렇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어. 기억이라도 나면 좋으련만. 십년이 지났잖아. 그 시간 동안 방치되었지. 나는 죄를 지은 것일까? 아무것에도 답을 할 수가 없어. 그냥 나는 ..
한 작가를 한 작품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기특한 생각 같은 것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한 권의 책을 읽게 되면 그 책을 쓴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최소한 하나 정도는 더 읽어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처음 읽게 된 작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냥 한 권 정도는 더-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라고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나름대로 평가를 내리고 싶어하는 내 기질 때문인 건지도 모르겠고. 요시모토 바나나라면 꽤 유명한 작가지만 나로서는 그 동안 손을 대본 적이 없다가 을 읽은 것이 몇달 전 일이다. 어떤 느낌인지,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조금 감은 왔지만 한 마디로만 말하자면 솜사탕같은 이 여자의 글솜씨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솜사탕이 ..
나는 회색 신사에게 이미 시간을 빼앗기고 있어요. 그래서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요. 아무리 시간을 아껴 쓰려고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되도록 안 만나려 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일은 되도록 안 하려고 해요. 그러니 모모, 얼른 나를 이 회색 신사로부터 구해줘요. 모모는 그렇게 해줄 수 있잖아요. 그 마을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모모가 필요해요.
공동체에게 닥친 문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든 죽음이든 개개인의 것이라는 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공동체의 운명이라는 것 따위 이해할 리가 없다. 아무리 카뮈의 최대 걸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이라도 해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면 무슨 감동이 남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냥, 혼자서 이 시간들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밖에 모르는데.
아야의 이야기에 푹 빠진다. 작은, 검은 머리의, 풍성한 몸매를 지닌 그 여자를 떠올린다. 칼리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비쩍 마른, 훌쩍 큰,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속에 숨어있는 그 사람을 떠올린다. 섹스는 생물학적인 것이다. 그 단순한 한 가지 사실이 어째서 인간에게 이토록 중대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칼리의 문제가 크나큰 것이란 것을 이해한다. 왜 그럴까? 왜?
때때로 만나는, 내가 감동받지 못하는 명작. 그래도 그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을 고르라면 마지막에 실려있는 두 편. 와 .
딱히 뭔가를 알고자, 배우고자,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독서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친구들을 만나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책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완벽하게 무지했다. 신경숙의 청승맞은 글 때문에 좀 더 칙칙한 성격으로 사춘기를 보냈다- 라는 정도가 아마 내가 인정한 책에게서 받은 영향의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때때로, 무언가를 느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느낀 후에 무언가를 깨닫고는 한다. 28년이나 산 후에 그러기 시작했다고 하면 일견 우스울 수도 있겠으나, 느끼는 것만을 중요시하며 살아온 나에게 이것은 나름대로의 놀라운 발견인 것이다. 김규항을 읽고, 김수영을 읽고, 홍세화를 읽으면서 말이..
딸기맛 사탕을 입에 물고, 하얀색 솜이불을 덮고, 넓고 포근한 침대에서, 잠을 자야할 것만 같아. 나는 요즘 내가, 어떤 글을 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냥, 그냥, 읽고 싶다거나-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다인 것 같아. 그렇지만 막상 읽고 나면, 이렇게 마음에 차지 않아서. 늘. 늘. 입만 비죽거리게 돼. 심술에 찬, 일곱살 여자아이같은 거지.
01. 왜 조금 불쾌했느냐 하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축구를 끌어들였다- 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선 안 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더 재밌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는 것보단 그래도 축구팬이 읽었을 때 더 재밌을 책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나는 조금 불쾌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축구가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하고 대단한 것으로 대우받길 원하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02. 결혼이란 제도가 모순 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설득력있게 설명하진 못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설득하거나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냥 나에게 그렇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한 남자와 결혼하든 두 ..
오류에 빠진, 내 삶을 생각한다. 그런 계기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 반성을 거듭하며 사는 일이란 분명히 지치고 피곤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김규항의 글은,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친다. 나는 글을, 글쓴이와 동일시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김규항, 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김규항의 글이 나에게 가르친 것을 잊어버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되새겨 두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데 얼마쯤은 버팀목이 되고, 구원이 되고, 안내자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 세 청년 中 - [몸이 늙는 것은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 선택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씩 하루도 빠짐없이 신념과 용기와 꿈이 있던 자리..
그 소년은 마커스이기도 하지만 윌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마커스의 성장담이기도 하지만 윌의 성장담이기도 하니까. 사람이 꼭 이전과 많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 '성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인생을 소통불능의 것으로 만들던 그 몹쓸 것들과 조금 더 멀어질 수 있다면 인간은 이전보다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 마커스가 또래 아이들과 같은 취향을 가지게 되어서, 윌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어서, 즐겁거나 안도감이 생기진 않는다. 그저 나는 이번엔 씁쓸해하지 않으면서 동의하는 것이다. 소외라는 것을 겪고 있는 인간이 그 소외로부터 괜찮아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주는 또 다른 인간을 만나는 것 뿐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이것은 가 내 안에서 일궈낸 의외의, 그리고 굉장..
나의 기본 정서는 슬픔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 또는 그 외의 것들은 내가 슬프다고 생각한 후에 좋아하게 된 것들이다. 나는 웃기거나 재밌거나 즐겁고 행복한 것을 느끼는 재주가 별로 없다. 대신 나는 많은 것들이 슬프다고 느낀다. 때로는 눈물에 첨벙대는 것들도 그렇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들도 그렇고, 때로는 웃긴 척- 재밌는 척- 별거 아닌 척- 행동하는 것들도 그렇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보아도 닉 혼비의 이 작품은 어쩐지 슬프고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조금쯤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이해한다거나 알 것 같다고 말하기는 싫다. 내가 뭔가를 이해한다거나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뭔가를 이해한 척, 나도 아는 척, 이렇게 감정 이입되는 순간을..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나는 겁이 나는 거야. 다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거야. 거창하게 자아의 신화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야. 나는 그냥, 이렇게 계속 모른 체 하는 나를. 이렇게 모른 체 하면서 살고 있는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 뿐이야. 이런 식으로 흔하디 흔한 말에 슬퍼하게 되는 것이 이젠 싫어.
자살, 은 정말 인간의 배부른 투정의 결과인 걸까.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일까. 나는 베로니카가 진짜 죽음 앞에서 결국 다시 삶을 꿈꾼 것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어째서 늘 삶이 죽음보다 옳은 쪽에 서게 되는 것일까. 어째서 살아남는 쪽이 늘 죽어버리는 쪽보다 현명한 쪽이 되는 것일까. 베로니카는 다시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 먼저 죽기를 결심했던 자신의 결정이 배부른 투정이었음을 긍정해버렸다. 지구의 모든 인간은, 이렇게 마음껏 자살을 꿈꿀 자유조차 가지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물론 그녀는 어리석고, 나는 그런 그녀를 비웃기 쉽지만 내가 그녀와 다른 것은 그녀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였고 나는 그렇지 않는 것 뿐이다. 어쩌면 어리석다는 것은 그 때 그 때의 마음에 자신이 휩쓸리는 것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마담 보바리가 원한 것은 자작이나 레옹, 로돌프와 같은 다른 남자가 아니라 '현재 자신에게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런 것을 찾아헤매고 현실을 돌볼 줄 모르는 이에게 남는 것이 추문이나 자살 뿐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서글프다.
엔도 슈사쿠의 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유나 해결책을 모르는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그 압박감은 이상하게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에 자꾸 답답해진다. 나는 그 답답함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을 했고 그러다 문득 그것의 희미한 그림자를 포착한다. 이 답답함은, 이 책 속의 인물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아무런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누구도 노력하거나 애쓰거나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얼핏 보면 '스구로'는 유일하게 양심적인 의사로, '도다'는 죄책감 따위 전혀 알지 못하는 의사로 그려지는 듯 하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똑같은 인물이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고 잡혀온 포로를 생체해부하면서도 어차피 그들은 죽을 것- ..
01. 오프시즌을 견디다 못해 를 다시 읽었다. 농담처럼 이것은 우리의 '성경'이라 했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그냥 재미있다거나 공감이 간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나 책을 반복해서 다시 보는 이유는 두번째의 느낌이 처음의 그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나에게는 이 책 역시 그러했으니 두번째 본 는 처음 보았을 때의 재미나 공감을 훨씬 뛰어넘은- 굉장하고 확실한 무언가를 나에게 남겼다. 다른 땅의, 나이와 성이 다른 축구팬이 자신의 팀에게 가지는 감정이 이토록 나의 마음과 닮아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내가 남에게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을 차치하고 내가 나에게조차 이해시키지 못했던 축구에 대한, 아니 대전 시티즌에 대한 내 마음이 이 책을 읽으면서 차곡차곡 이해가 되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리라. ..
삶이 인간에게 얼마나 흉폭하게 굴 수 있는지. 때로는 괴로움이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그저 내 마음 안에서만 생겨나고는 하지. 나는 그저 나 때문에 괴로운 거야. 내 마음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생을 살아가게 하였으니, 신은 또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내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난도, 외로움도, 육체의 아픔 때문도 아니야. 그저 이 마음 때문인 거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아주 희미하여 언뜻 봐서는 눈에 잘 들지 않는 정도라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재능이 아무렇지 않게 시간 속에서 닳아 없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이 곳에서 밥을 먹고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내가 그런..
나는 그 남자의 손에서 느껴졌던 온기나, 그 남자가 두 눈을 휘면서 웃던 모습이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같이 있고 싶던 마음도, 자주 보고싶어지던 마음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나를 사랑하냐고 묻지 않았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 남자를 사랑했다. 확인도, 확신도 필요없었다. 이유 따위는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만큼 확실한 사랑이었다 해도 위대하거나 고결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한때의 연애 상대에 그쳤다. 그 사랑을 특별한 것으로 승화하여, 괜히 내 사랑에 대해 젠체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이것이 사랑이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하는 이유는, 뭔가 사랑이 대단할 거라는 착각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그냥 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