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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나는 내가 나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그 때 읽은 책은 지금 읽은 책과 다른 책이고, 다음에 읽는 책은 또 지금 읽은 책과 다른 책이겠지. 그렇다면 대체 살면서 얼마나 오랜 시간 책을 읽어야, 난 제대로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대체 이것들을 읽어서 다 어디에 쓰려는 걸까. 몰라몰라몰라. 나는 내가 나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가슴을 칼로 사등분 내면 심장이 보일까. 심장은 탐스럽게 생긴 고깃덩어리 같을까. 어째서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심장은 같이 슬퍼할까. 세상에 없는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바보처럼 감동하는 심장을 가진 걸까. 그렇지. 참, 이 책은 수작이고 수작이고- 훌륭하고 훌륭한- 좋은, 멋진, 그런 책. 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책을 써내는 동안 나는 대체 무엇을 하면서 스물 아홉 해를 살았고, 또 다시 무엇을 하며 스물 아홉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 사람이 삶에서 해낼 몫이란 저마다 다 다른 걸까. 그렇다면 난 어떤 몫을 해내기 위한 존재인 걸까. 존재라. 음, 존재. 이런 얘기를 하다보니 꼭 내가, 신을 믿는 사람 같아졌지만. 음음, 어쨌건, 마음이, 좀, 그렇고 그렇구나.
재미있게 읽고서는 문득 지겨워졌다. 나,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지나치게 일본 도서만 읽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그만 이제 내가 가던 방향으로 돌아서 가야겠다. 오쿠다 히데오씨, 이제야 꽤 마음에 들었는데 만나자마자 안녕이네요. 다음에 또 볼 기회가 있겠죠. 그 때까지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안녕, 아저씨.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이 책이 처음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 역시 처음의 흥미진진함을 계속해서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많이 노력하고 많이 공들였다는 작가의 땀 같은 것이 느껴져, 그 부분에서 벌써 만족 같은 것을 해버리는 나를 본다. 책을 읽을 때 굳이 사람을 볼 것이라면, 작가가 아니라 등장 인물을 보는 것이 옳지만 내 시선은 자주 책 너머의 누군가에게로 향해-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글쓰는 사람들. 이 수고스러운 땀냄새와, 책장 한 장 한 장에서 느껴지는 우아함을 끝까지 잃지 말고, 다음 이야기에서도 멋진 김진과 만나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탁환의 새로운 책을 샀다. 이번에도 즐거운 만남이길 바란다.
[그 때 괴로움 속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말하자면 물독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초조해해도, 백년 동안 몸이 가루가 되도록 노력한다 해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나갈 수 없다고 뻔히 알고 있는데도 나가려고 하는 것은 억지다. 억지를 부리려고 하니까 괴로운 것이다. 재미없다. 스스로 나서서 괴로워하고, 스스로 좋아서 고문을 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 그만두자. 마음대로 해라. 드르륵은 이것으로 그만 두겠어."] [세월을 잘라내고, 천지를 분쇄하여 불가사의한 태평으로 들어간다. 나는 죽는다. 죽어서 이 태평을 얻는다. 태평은 죽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
이 남자의 자기애, 자의식, 자아 도취, 자기 만족을 좋아했다. 이 남자의 자기 비하, 자기 연민, 자기 변명, 자기 부정을 좋아했다. 늙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는, 청바지가 많다는, 멋진 차를 가지고 있다는, 서른이 넘었다는,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이충걸이라는 남자. 나는 어느 날 불쑥 이 남자를 만나봤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어차피 마주칠 것은 특별함 따윈 가지지 못한 남자 인간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이 남자의 글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자의식이 뚝뚝 떨어지는, 끝없는 자기 비하 속에서도 자아 도취의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자기 만족적인 이 남자의 글- 을 말이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조명의 조도가 낮다. 내 구두굽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언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난, 글이 모든 예술의 상위에 있다고 믿는 문자 예찬론자로 자랐다. 그럼에도 내가 가끔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조명의 조도가 낮고 주위가 조용하여 내 구두굽 소리가 잘 들리는 미술관의 그 분위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술관을 거니는 게 좋았다. 공기 맑은 산책로나 조용한 호숫가를 거니는 것이 좋듯이, 미술관을 거니는 것 또한 좋아하고 있었다. 1월 10일. 오랜만에 미술관을 거닐었다. 그렇게 거닐다가 만났다. 마음이 조금, 아파서 오래 봤던 그림. 르네 마그리트의 이다.
음음- 이제야 쓴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 감흥이 없다. 이런 식의 책들.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가 기억에도 없을 만큼, 별다른 감흥이 없다. 가네시로 가즈키나 오쿠다 히데오나, 내 기분엔 다 그게 그거다. 요시모토 바나나나 에쿠니 가오리가 다 그게 그거인 것처럼. 그래도 옆에서 매우 좋다고 하니까, 또 나름 좋은가보다- 하는 것 보면 난 정말 귀가 얇다. 어쨌거나 그래서 읽다가 말았던 게 떠올라 마지막까지 읽었는데, 이 책은 처음에도 그랬듯 다 읽고 난 지금도 제목이 참 마음에 들고- 주인공 아저씨... 뭐 나쁘지 않지만, 박순신군. 어쩐지 별로 멋있지 않고. 그래도, [불안이나 고뇌가 없는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 인간일 뿐이야. 정말 강해지고 싶으면 고독이나 불안, 고뇌를 물리치는 방법을 상상하고, 배..
나에게선 우유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냄새가 참 좋다고 자주 말해, 나는 그 때마다 장난스레 향기라고 정정해 주곤 했다. 머리카락에, 목에, 손에 코를 가져다 대고선 냄새를 맡곤 했다. 나는 그 때까지 내 냄새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게선 우유 냄새가 난다고 믿어버리게 되었다. 조금 달짝지근하다고. 고소한 것도 같다고. 따뜻하거나 부드럽다고. 웃으면서 말했으니까. 눈을 감거나 손을 잡거나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으니까. 그 믿음이 언제쯤에 깨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내내 역사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역사 시간이 되면 수업이 수업같지 않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듣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정말로 정말로 수업을 잘 듣지 않던 내가 선생님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들었던 이야기가 '사화'와 '소현 세자'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 흐름이 너무 기가 막히게 재미있었고, '소현 세자'는 그 인물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름부터 슬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현 세자'라니 이름부터 어쩐지 참 비극적이라고. 그 소현 세자를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소현 세자의 삶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들로 점철되어 있으니, 이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그래도 이 책..
나는 사랑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며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고 고개 숙일 뿐이야.
앤 패디먼은 작가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책으로 뒤덮힌 집에서 가족끼리 함께 모여 단어 맞추기 게임을 하면서 자랐다. 레스토랑으로 외식이라도 하러 나가면 온 가족이 모두 메뉴판에 고개를 파묻은 채 오탈자를 찾아내는 데 정신을 잃곤 했다고 한다. 그런 앤 패디먼은 자라는 동안 책과 멀어지기는커녕 책을 통하여 결혼까지 했으며, 앤 패디먼이 꾸민 집은 집이라기보다도 점점 더 책방 같은 곳으로 변해갔다. 남편 역시 마흔 두 번째 생일 선물로 헌 책방에서 9kg에 달하는 책을 사줄 만큼 감각있는 남자로 선택한 앤 패디먼은, 책과 바른 철자와 바른 문장에 (어쩌면 집착일지도 모를) 애착을 가지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혼한 지 5년 만에, 자신과 남편의 책을 섞는 것이 옳다고 결정..
사요나라 갱들이여. 이 얼마나 슬프고도 로맨틱한 제목이란 말인가. 한 편의 소설은 한 편의 시처럼,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소설처럼 읽혀지고 다시 또 읽혀진다.
아무도 나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야단치지 않았다. 그런 내 시간 속에서, 나를 타이르고 가르치고 야단치고 있는 최초의 인간을 기억해낸다면 그것은 어쩌면 류일지도 모른다. 나는 류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잊지 않았으나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들이 소곡소곡 떠오르는 이유다. 나도 알아. 나도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아- 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대답해도 마찬가지로 한심해빠진 내가 여기에 있지 않는가. 알면서도 넋을 놓고 앉아있는 무력한 내가 여기에 있지 않는가. 그런 나를, 또 현실을 여과없이 마주쳐야 하기 때문에 나는 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프다. 기쿠. 하시. 심장 소리를 듣고 있던 야마네. 다..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가지 태도가 있다. 예를 들면, 나 역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족속이란 말이다. 내세울 것도 없고 잘난 데도 없다. 예쁘지도 않고 엘리트도 아니고 괜찮은 직장도 가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해서 나를 한심해 한다거나 무기력증에 빠지진 않는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주류 인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혐오하거나 존재를 부정하고 될 대로 되라는 듯 무너지고 있는 걸까. 그래, 그런 것.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가지 태도. 사유리의 말에 생각한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었더라. 그래도 남아있는 자의식이 있다. 나는 그저 견뎌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맞받아칠 만한. 살아가고 있다고 읊조린다.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한, 나는 그저 견뎌내는..
우울할 때. 기분이 좋지 못할 때. 어쩐지 힘이 없을 때. 조금 울고 싶을 때. 이 책 속의 호빗들이 나를 웃게 하고, 기분 좋게 하고, 꿈꾸게 하고, 계속해서 이 책을 잡고 있도록 했다. 영화 속에서는 샘이 단연 돋보이는 호빗이었다면 책 속에서는 피핀이 무척 눈에 띄는 호빗. 나는 피핀이 귀여워 책을 읽는 도중에 두 세번쯤 동동동 발을 구르기도 해야 했다. 이들의 부드러운 강함. 가벼운 정의로움. 수줍은 자신감. 귀여운 낙천주의는 살면서 내가 가지고 싶은 것. 하지만 절대 가지지 못할 것. 이미 형편없이 좁아진 내 상상력으론 이 책의 묘미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사실은 가장 좋아했던 프로도를 다시 만나고 샘과 피핀과 메리를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많이 반가웠다.
칼은 노래한다기보다는 울고 있었다. 그 나직하고 서러운 울음이, 쓸쓸한 만큼 또 강직하다. 처음 를 읽고 그 책의 무엇을 그리도 마음에 들어했던가- 생각해보면, 그 책을 써내려가던 작가의 문체였던 게 아닌가 싶다. 똑같이 를 읽으면서, 김훈의 문체에 빠져든다. 이런 문체를 조금 그리워했다. 우리 소설에서만 내가 느낄 수 있는, 문체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약한 백성을 지키려 들었던 칼을 찬 영웅은 하지만 백성들을 자신의 마음처럼 온전하게 지킬 수 없어서, 그럼에도 도망치거나 그만둘 수도 없어서, 외롭고 고단했을 것이다. 나는 위인전 속의 용감무쌍한 이순신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파르르 떨고 우는 이순신을 생각한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쳐오다, 그 사거리에 기백 서린 몸짓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에세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가는, 소설로서 말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가의 에세이를 전혀 읽지 않는다거나 좋게 읽은 에세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신경숙의 이나 하루키의 를 내가 얼마나 즐겁게 읽었던가. 를 통해서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소설가들의 에세이에는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선택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마루야마 겐지라면 내가 하루키보다 (열 여덟 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곱배쯤 더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에세이 역시 하루키의 것보다 일곱배 마음에 드는 것으로 써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하지만 나는 읽는 동안 이 책은 최악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뿌리 깊이 박힌 생각을, 오랫동안 생각해왔기에 이미 사실로 규정해버린 그런 생각을, 몇 자의 글로서 바꾸어 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저런 여성은 되지 말아야 한다- 라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메데이아는 그 존재가 밝혀진 이래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그런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대상을, 닮고 싶고 동경하는, 또한 안쓰럽고 그래서 보듬어주고 싶은 대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크리스타 볼프가 한 일은 그런 일이다. 나는 어느 쪽의 말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동일하나 동일하지 않은 대상을 글로서 내게 일깨워줬다는 사실로 이 책에 조금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가. 글을 사랑했던가. 글읽기를 즐기는가. 글쓰기를 꿈꿨던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