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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더 이상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너를 끌어 들이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나는 사랑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하겠다. 가끔은 이 도시 안에서 네가 무엇이든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 생각은, 때로는 내게 살아갈 힘을 주고 때로는 내게 허탈한 좌절감을 안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생각과 무관하게 이제 와서 분명해진 것은- 너는 내게 더 이상 현재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너는 이 세상의 공기에 숨을 보태며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의 너는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죽었다. 꿈이나 환상, 망상 속에서만 말을 하는- 너는 나에게 있어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다. 더 이상은 내 삶의 무엇에서도 너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말 한다고 해서 고통이 고통다워지는 건 아니야. 운다고 해서 슬픔이 슬픔다워지는 것도 아니야. 설마, 너만 특별히 아플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착각에서 깨어나. 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 다 비슷해. 다들 아프고 다들 힘들어. 그러니까 제발 적당히 좀 징징거려. 그런 우는 소리, 내가 꾸는 악몽보다 더 끔찍해.
며칠전부터 밀려있던 일을 숨 한번 크게 쉴 틈도 없이 후다닥 해치워버리고, 출근 이후 처음으로 휴식 시간을 가지던 참이었다. 하루의 첫 식사를 할 시간이었지만 지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식욕이 없어졌고, 결국 두어숟갈 뜨다만 밥공기를 덮어둔 채 커피를 마시려던 참이었다. '세상에, 다 젖었잖아.' 놀란 듯 외치는 목소리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던 Y의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생각을 하는 순간, 좌락좌락거리며 내리는 빗소리가 들렸고, 그러고보니 주완이 올 시간이 됐구나- 생각을 하는데 흠뻑 비에 젖어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주완이가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에서, 동그란 얼굴에서, 조그만 귓볼에서, 얇게 입은 티셔츠에서, 뚝뚝- 그치지도 않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
01. 언제나 그렇듯, 미친 듯이 일에 쫓겨 정신없이 문서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우리 축구니 뭐니 때려치우고 그냥 놀러나 가자.] 휴가를 제대로 못 즐기게 된 것에 대한 투정인가, 생각을 하는데 문득 머리를 스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여름 휴가 대체용으로 잡아뒀던 동아시아 대회 투어 일정. 그 동아시아 대회에 나올 수 있을 지 없을 지 미지수였던 녀석이 좋아하는 선수. 혹시나 하면서 왜 그러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아니나 다를까였다. 돌아오는 답은 예상한 그것에서 조금도 비껴가지 않은 것. 녀석이 그토록 훌륭하다고 믿고 기대하고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은 대회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훌륭하다고 믿고, 기대하고,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 역시- 언제나 그렇듯..
10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12시가 된다. 하루 중 14시간이 고스란히 출근과 일과 퇴근에 쓰이고 있고, 나머지 10시간 중 절반은 잠을 잔다. 씻고 청소하는 시간을 최대한 짧게 잡아도 결국 하루에 내게로 돌아오는 시간은 고작해야 서너시간. 그 시간 안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인터넷을 하고, 일기를 쓰고, 얘기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아무리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게 많아도 그 모든 일을 무조건 서너시간 안에 끝내야만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 안다.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사는 것이 그냥 사람처럼 사는 거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생활을 견디기가 힘들고, 다른 사람들 역시 이런 생활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
01. 나는 김은중이 좋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억나는 것도 없고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확실하게 나는 김은중이 좋다.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볼 때마다 또는 생각할 때마다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김은중이 좋다. 나는 김은중이 너무나도 좋다, 라고 말이다. 김은중은 현명하고 침착하며 곧고 성실하다. 그다지 멋질 것도 없고, 그다지 잘생길 것도 없지만 나는 김은중이 가지고 있는 그 '바른' 모습이 좋다. 현명하고 침착하며 곧고 성실한, 무너진 적도 없고 무너지지도 않을 김은중이 가지고 있는 '바른' 태도. '바른' 자세. '바른' 마음. 김은중을 좋아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좋아할 수 있다니 다행이다. 그는 ..
01. 자동차 바퀴가, 빗물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내밀어 창 밖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비가 내리고 있다. 사라지기 직전의 소리이기 때문에 빗물의 소리는 특별한 감흥을 준다. 블라인드를 걷어놓고 창 밖을 바라본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순간에는 어쩐지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02. 그럴 수 있다면, 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나는 물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수영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물 속에 잠기게 된다면 아마도 꼼짝없이 죽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생명의 마지막을 물 속에서 보내고 싶다. 검은 강물의 바닥에서는 영영 부서지지 않는 평화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붉은 색, 반짝이는 불빛들 곁에서 나는 지난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영원한 침묵은 영원한 평화의 길..
01. 그 손은 내게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가끔 넋을 잃고 사람들의 손을 바라본다.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의 시작이다. 나는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본다. 그 손은 나로 하여금 정의내릴 수 없는 상상력을 가지게 만든다. 그것은 때로, 다 자라난 남자의 손이기도 하고 아직 남성과 여성- 어느 쪽의 정체성도 가지지 못한 소년의 손이기도 하다. 그것은 때로, 아름답고 고운 소녀의 손이기도 하고 화려함과 섹시함을 갖춘 여자의 손이기도 하다. 나는 무심코, 누군가의 손에 넋을 잃는 순간을 만난다. 그것은 내가 그 손의 주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순간이다. 02. 소년은- 차분한 눈과 작은 목소리와 알아보기 힘든 미소와 작고 고운 손으로 나에게 평화를 선사한다. 이 무더위와,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자괴..
마치, 비가 내릴 것 같은 저녁이다. 뒤늦게 문자를 확인하고서야 오늘이 리그데이였다는 걸 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경기 결과를 확인하니 대전은 패하고 김은중을 골없이 경기를 마쳤다 한다. 왠종일 기쁜 일이 하나도 없구나, 싶어서 노래를 틀어놓고 침대에 두 팔을 벌리고서 눕는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떠들다 왔더니 기진맥진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다. 한숨을 쉬면서 눈을 감는데 마침 The corrs의 only when I sleep이 흘러나온다. 이 앨범이라면, 언젠가 김은중에게 가져다 준 적이 있는 앨범이다. 앨범을 건네자마자 그 자리에서 비닐을 벗겨 노래를 틀고 가던 김은중이 생각난다. 순간, 웃음이 난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우습긴 하다. 이런 가운데에도 그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는 사실. 사람이 희망..
각자 견뎌야 할 몫이란 게 있다. 누구의 것이 크냐 작냐, 누구의 것이 무겁냐 가볍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각자의 몫은 각자가 견뎌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섣부른 동정은 불쾌감 이상의 것을 불러들이지 못한다. 어설픈 위로는 관계의 허망함만 깨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의 몫은 내가, 너의 몫은 네가, 그렇게 각자 견디도록 하는 것이 좋다. 종종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세상엔, 절대로 누군가와 함께할 수 없는 성질의 것도 있다. 이제는, 확신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멈추겠다.
01. 나는 지금 주문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사실 내 마음도 아니고, 진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고, 그냥 외롭고 심심해서 시작한 놀이같은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 나에게도, 너에게도 똑같이 미안하다. 02. 세상에, 수많은, 불편한 사람들과의 관계. 그 속에서 침묵도 평화로울 수 있다면 기꺼이 상대를 사랑해도 괜찮은 게 아닐까? 라고 나는 잠깐 착각을 해본다. 03. Replay. Replay. Replay. 새삼 깨닫는 일. 내가 김은중의 골을 사랑한다는 것. 04. 만약에, 이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면- 나 정말 나에게도 너에게도 so sorry. so sorry.
보일러를 튼다. 바닥이 따뜻해진다. 등을 대고 바닥에 눕는다. 몸이 나른해진다.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새벽이다. 어제의 하루와 오늘의 하루에 대해서 생각한다. 목이 아프다. 열 손가락을 통해서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간다. 이렇게 1년을, 10년을, 결국은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어떤 인간이 나를 떠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반짝거리는 강물 위의 불빛. 달리는 차 안에서 흐르는 노래. 생각해보니 커피숍에 스페인제 라이터를 두고 나왔다.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진다. 나를 좋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작에 말했어야 했다. 나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강물 위엔 수증기 마냥 뿌연 그림자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생각없이 턱을 괴고 앉아서 한참이나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사람의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을 살면서 자주 했다. 내 마음 안에는 평화가 없었다. 한계, 를 느낀다. 여기. 이곳. 내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한계. 네가, 또는 당신이, 또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더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은 괜찮다. 그렇지만 내가 너를, 또는 당신을, 또는 그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나 더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은 피곤하다. 그것은 결국 내가 나 스스로에게 느끼는 한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이상은 너와, 당신과, 또는 그 어떤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이기..
01. 월급을 받았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월급다운 월급이다. 그래봤자 방세 내고, 밀렸던 돈 좀 갚고 하면 남는 것은 거의 없다. 결국 일을 하기 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태로 다음 월급날을 기다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이것이 삶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벗어나면 그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배부른 소리다. 내 투정은 늘 이런 식이었다. 02. A를 그냥 스쳐지났던 날을 생각한다. 그 때 내가 A의 무엇을 마음에 들어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것은 A의 얼굴도 아니었고, 성격도 아니었고, 조건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A의 얼굴도, 성격도, 조건도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A를 좋아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A와 ..
01. 나는 샤워를 하고 커피를 끓였다. 달달달 끓는 물소리를 들으니 온 몸에 끈적하게 묻어있던 피곤이 그제야 조금 옅어지는 듯 했다. 동생의 방에서 이부자리를 들고 나오던 언니가, 그런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새벽 같이 일어나야 하는데, 무슨 커피야.” 언니의 목소리에는 책망이 묻어 있었다. 외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언니는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려면 뭐 어때?’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걸 줄 수 있는 것은 니코틴이나, 카페인뿐이었다. 엄마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엄마는 내가 스무살이 훌쩍 넘을 때까지도 밥 한번 짓게 하지 않으셨다. 그런 티를 고스란히 내느라 나는 커피 한 잔도 맛있게 끓여내지 못했다. 사실 내게 필요한 건, ..
비가 온 다음이라 그런지 정오의 태양도 그리 뜨겁지 않았다. 얼굴에, 목에, 팔에, 다리에 뜨거운 태양빛이 와닿지 않는 것이 좋아서 고여있던 빗물이 튀는 것도 잊은 채 신나게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나처럼 신나 보이는 여자 아이를 마주쳤다. 아이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풀나풀 치마깃을 흔들고 있었고, 손에 든 비누방울을 후후 열심히 불어대고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나는 저런 모습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렇게 명량한 얼굴을 하고, 나는 저렇게 기분 좋은 장난을 치며, 나는 저렇게 예쁜 모습으로 거리를 걸어간 적이 없었다는 생각.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을 때, 유쾌했던 적은 별로 없다. 아주 가끔- 밖으로 통하는 문..
"아,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가 없어요." "왜요, 민숙씨는 늘 업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게요. 업되어있는 게 아니라, 다운 안 될려고 발악을 하는 거죠."
검은 물을 바라본다. 물 위에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본다. 넋을 잃는다.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불행이나 어두움이란 말과 잘 어울린다. 나는 날카롭던 여자의 두 눈을 떠올리며, 여자의 목소리 역시 날카로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없다. 분명 여자와 두어마디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지만, 어쩐 일인지 끝끝내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기억은 없다. 생생한 것은 오직 여자의 얼굴.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곱지도 마음에 들지도 않았던 얼굴. 그러므로 기억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얼굴이지만, 문득문득 살다가 그 여자의 얼굴은 떠오른다. 조용히 앉아서 검은 물을 바라보다가. 그 물 위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다가. 동정, 이거나 동질감, 이었을까..
비가 내리고, 내리고, 계속해서 내리고, 다시 내리고, 또 내린다. 감기 조심 해야겠다.
01. 문득, 쌍동이 빌딩이라는 이름으로 여의도에 서있는 두 채의 건물이 우스워 보였다. 그런 이름으로, 그런 모습으로 서있다는 사실이 치졸하고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넘어오는 길에는 항상 기분이 좋았는데 갑작스럽게 든 그 생각 때문에 그 길을 즐기지 못하고 돌아와 버렸다. 내가 가진 즐거움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은 언제나 다름아닌 나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쩐지, 어이가 없어졌다. 02. 버스에서 내리는데 예닐곱명쯤 되어 보이는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서로 멱살을 잡고 땅에 서로를 내팽겨치며 말 그대로의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딱 그 무리 앞에서 내리게 된 사실과, 그 무리가 하필이면 내가 내려야 하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