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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지하철 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있었다. 사무실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고, 지하철 역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던 우리는 택시를 타고 역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택시를 타고 내리는 동안 기습처럼 내 옷에는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물기를 머금은 온 몸과 잔뜩 젖은 우산을 처치곤란해하며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택시의 앞유리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를 생각했다. 금세 유리가 부서져 내 이마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빗줄기였다. 나란히 앉은 택시기사는 손님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듯한 어투의 말들을 끝도 없이 게워내고 있었다. 나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버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후두둑 유리창을 치고 가는 빗줄기는 금방이라도 내 머리 위로, 내 어깨 위..
오랜만에 열심히 일기를 썼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꽤 긴 일기가 씌어졌다. 일기를 마치기 위해 마지막 문장을 쓰려는 순간, 오류가 났음을 알리는 메세지가 떴다. '확인'을 눌렀더니 인터넷이 꺼졌다. 내용은 다 기억나지만 다시 쓸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진 오늘의 내 일기에게 명복이 있길 비는 인사 뿐. 어쩐지, 새벽부터 좌절이다.
01. 읽고 싶은 책이 많다. 보고 싶은 영화가 많다. 그런데 그것들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내가 게으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들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그다지 간절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02. 여행. 이국. 낯선 땅. 새로운 것. 동경의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동경하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향해 떠나지 않는 이유도,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03. 일본전까지 결국 0:1 패배. 그런 패배, 그다지 나쁠 것도 없는 패배. 나와는, 상관이 없는 패배. 그리하여 슬프지 않은 패배. 그러므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다. 응급차가 달려오는 모양이다.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린다. 가까운 계곡 어디선가 사람이 물에 빠진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내 평화가 끔찍해진다. 이 산속에 들어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삶을 지탱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내 일상과 먼 곳이라 하여 다른 일상이 존재하지 않을 리는 없는 터. 나는 낙원과 환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도피를 생각하고 있는 것 뿐이다. 웃고 이야기하며 왁자지끌해지는 순간의 내가 가짜는 아니다. 나는 매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늘 마음은 이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 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찾으려고만 한다. 나는 나를 붙잡을 수가 없다. 가만히 바람 소리에 나를 내맡겨 보지만- 예쁘게 자란 드높..
없었던 순간처럼, 시간은 가고. 내가 즐거웠던 것이 즐거움이 맞는지 다시 또 의심하고 자문하는 시간. 당신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맞는지.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 맞는지.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진다. 여름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지금은, 아우구스투스의 달.
01. "성격은 복잡했다. 엄격한가 하면 상냥하고, 친절한가 하면 까다롭고, 쾌락적인가 하면 금욕적이고, 씀씀이가 야박한가 하면 시원시원하고, 불성실한가 하면 더없이 성실하고, 잔혹해 보일 정도로 무자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딴 사람처럼 온화하게 관용을 베푸는 식이다. 요컨대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로마 시대 사람이 쓴 유일한 하드리아누스 전기인 의 저자는 하드리아누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광대하기 그지없는 로마제국의 변방을 쉬지 않고 돌아본 열정과 의지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내가 결정적으로 하드리아누스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저 평에 등장하는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라..
헛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 제대로 잠들지 못하기 때문에 졸리고, 졸리기 때문에 피곤하고, 피곤하기 때문에 쉽게 짜증이 나는 상태의 지속. 할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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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바람이 분다. 저벅저벅- 거리를 밟아 내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시원하다. 기분이 좋아진다. 발자국 소리도 흥겨워진다. 저벅저벅- 여름이 되면 좋은 것 하나. 스타킹을 신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여름이 되면 좋은 것 둘. 언제나 샌들을 신을 수 있다는 것. 02. 며칠만에, 시원해진다 싶더니 비가 내릴 모양이다. 샤워기를 잠그자 창 밖으로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욕실에 난 작은 창문으로 슬그머니 밖을 내다본다. 바람이 분다. 03.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아서, 오랜만에 친구와 수다를 떤다. 별로 즐거운 소식을 전하는 전화도 아니었건만,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었던 애들처럼 우리는 하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역시 대화의 화제는 공통의 관심사여야 좋은 것. 요즘 친구와..
01. 내가 누군가를 친구로만 생각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친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내가 누군가를 편하거나 친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편하거나 친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내가 줄 수 있는 이상의 감정을 받는 일은 부담스럽고 미안한 것을 떠나서 확실히, 싫은 일이다. 02. 지금의 나를, 내가 처한 상황을, 내가 어려운 이유를,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내 엄마라고 생각하니 조금 슬프다. 그렇게 원하는 데 가서 원하는 거 하면서 원하는 거 보고 먹으면서 사는 녀석이, 어디다 대고 투정이냐 물으면 난 할 말이 없겠지. 없게 되겠지. 그래서 늘 그러듯 아무 말도 안 하겠지. 엄마가 행복하지 못했고, 지금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늘 나에게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03. 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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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B는 약속 시간으로부터 꼭 한 시간 후에 나타났다. 어릴 적부터 나는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이런 나를 기다림에 익숙하게 만든 것은 J였고 나는 J를 만나고 헤어진 이후로는 누군가는, 또는 무언가는 기다려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B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한, 계속해서 만날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 몇번째 계속되고 있는 B의 지각도 (그것이 무척 싫은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게다가 오늘처럼 더위에, 또는 지겨운 일상에, 무기력함에, 지친 얼굴을 하고 B가 나타나는 날은 더욱 더 말이다. 02.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에겐 웃을 일도 있고 좋아하는 일..
덥다. 그러니 다행이다. 너무나도 더워서, 다른 생각 같은 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잠이라도 들어야겠다.
매일매일 일기를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정말로 세상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득바득 살고 있는 거 보면 인간이 참 대단하기는 하다. 마흔이면 불혹. 불혹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나이. 그러니까 그 때가 되면 괜찮아지는 걸까. 앞으로 13년만 어떻게든 버텨내면, 그럭저럭 괜찮은 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걸까. 옛말은 틀린 게 없다던데, 그 말을 믿고 살아갈 의지가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Y의 말은, 최근에 내가 이유는 알 수 없고 별다른 표현도 하지 않지만 우울한 상태에 접어든 것만은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벌써 4년째 한 자리에서 나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으니, 역시 Y의 눈치는 꽤 빠른 편이다. 기분을 좀 풀어줄까 해서 술을 사주기도 하고 밥을 사주기도 했지만, 그런 방법이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걸 깨닫고 Y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난 봄에 디카를 처음 산 날 시험 삼아 찍었다가 하드 안에 넣어놓고는 그대로 썩혀두고 있었다는 승룡이의 사진. 그렇다. 사진 속의 이 아이는 바로 승룡이다. Y가 생각해낸 이 마지막 방법은 그 순간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여, 금세 내 기분을 업업업 시켜줬다. 승룡이를 보지 못한 건 벌써 2주째이고,..
"보고 싶어." "그래?" "응. 보고 싶은 것 같애." 어차피 진실과 허상을 구분한다거나, 깊이나 정도를 가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내가 내뱉는 말들. 어디에도 이것보다 더한 진심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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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정말로 좋아하는 것 따윈 없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축구도, 영화도, 소설도, 김은중도, 좋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그것 뿐이다. 좋아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내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까 마찬가지지 않나요? 나는 이 마음이 순수하다거나,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란 걸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그냥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싶었던 거죠.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내 마음에는, 당신을 만나기 전과 똑같은 높이의 파도가 치고 있을 뿐입니다.
허망한 꿈 리무진과 속눈썹 귀여운 얼굴에서 와인잔에 흘리는 눈물 저 눈을 보라 그대는 어떤 의미인가 달콤한 케이크와 밀크 쉐이크 난 꿈속의 천사 난 환상의 축제 내 생각을 맞춰봐요 추측은 말아요 고향을 모르듯 목적지를 알지 못해요 삶에 머물며 강물에 떠가는 나뭇가지처럼 흘러가다 현재에 걸린 우리 그대는 나를, 난 그대를 이끄네 그것이 인생 그댄 날 모르는가? 아직도 모르는가?
01. 벌레가 한 마리 돌아다닌다. 발이 여러개 달린 벌레이다. 발이 많아서 그런 건지 무척 빠르다. 쳐다보고 있는데 머리가 어지럽다. 확실히 발이 많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혐오감을 준다. 그렇지만 어쩐지 약을 뿌린다거나 책으로 때려서 죽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는 지금 무섭거나 징그러운 대상을 무찌르는 것마저 하기 싫을 만큼 모든 것이 귀찮은 상태인 것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만연해있는 것이 바로 귀차니즘이라더니, 이러니 저러니해도 역시 나도 요즘 사람이 맞는 모양이다. 02. 오랜만에 친구와 나란히 앉아서 TV를 본다. 중국에 있을 땐 자주 보던 프로인데 한국에 온 이후로는 처음 보는 듯 하다. 저 프로가 아직도 하고 있구나- 싶어서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신화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