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180)
청춘
지겹다. 칭얼대는 나. 몸 사리는 타인. 왜 고작 이런 식일까.
01. 보고서 하나가 돌아왔다. 처음부터 좀 헤매던 것이었는데 시간도 너무 촉박하고 하여 대충 해서 내버린 게 문제였다. 완성도야 어찌되었든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일이니까, 새삼 이것을 다시 하기란 너무 어렵다. 좀 억울하기도 하고, 좀 짜증나기도 하고, 아무리 새로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집중이 안 되는 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나는 바로 이틀전,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진 후 아직도 그 웅덩이에서 질퍽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다시 일을 시작하라 하다니,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이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지 못한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02. 잘 오던 버스도 내가 기다리기 시작하면 삼십분 동안이나 안 오고, 기다리다 못해 택시를 잡아타면 그 바로 뒤에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는- 요며칠 인생이..
9월의 마지막 일기. 10월이 왔다. 갑자기 한 해가 가는 기분이다. 시간, 어쩌면 이렇게 술술 왔다 술술 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숨 한번 쉴 틈도 없이 바쁘다. 이런 생활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단 한번도 특별히 무언가를 열심히 해본 적이 없다. 내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내 생활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내가 철없는 아이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이에 걸맞게 자라난 게 맞다면 그런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하여, 그 시절의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의 나는 어른이다. 이토록 무의미한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서도 당장 관두겠다거나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투덜대지 않고 잘도 견뎌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좋든 싫든 내가 선택하고 있는 삶이니까 나 외에 다른 이에게 투정을 부릴 마음은 없다. 그저 감기는 눈꺼플을 밀어 올려가며 책상 앞에 앉아있다보니 삶이 너무 유치..
이 일, 해도 해도 끝이 안 난다. 재미도 없으면서, 나하고 잘 맞지도 않으면서, 돈도 안 되면서, 양까지 많다니. 최악이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 부디 마감날까지 이 보고서들을 다 작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_ㅜ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저 다 평범할 뿐이에요.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것 뿐이야. 나에겐 아무런 특별함이 없어요. 이런 나를 견딜 수가 없어요. 이것 밖에 되지 않아서 견딜 수가 없어. 다 싫어. 너도 아니야.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제발 진심도 아닌 마음으로 위로하려 들지 말아요. 위로 받는다고 해서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야. 참을 수가 없어. 생각하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아요. 해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끝인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내게 열정이 없기 때문이라구요. 아니요.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그런 게 진짜 문제가 아니예요. 나는 알아. 알고 있어.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라고도 생각해 봤어요. 그게 나한테 얼마나 절박한 문제인지 당신..
나의 온 몸이, 주위의 모든 것이, 견딜 수 없게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불결함 때문에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
좋은 일을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일만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웃고 있는 나에 대해, 떠들고 있는 나에 대해 계속 생각해왔다. 왜 내가 나를 이토록 불신하며 동시에 안쓰러워하고 있는 건지, 시간이 지날 수록 모든 것이 쓸모없다. 머리 속에 문장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마지막 모습은 나를 외면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쓸모가 없으니까, 이 문장도 쓸모가 없다. 웃음. 눈. 얼굴. 손. 그런 것들만. 지금 내게는 그런 것들만. 이 노래 좋다. Waiting for the sun.
돌아간다. 늘, 같은 자리다. 이런 나와, 이런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가 끊임없이 서로를 불신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또 나는 같은 자리에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 밖에 없어요. 미안해요. 서운해하는 목소리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노력하는 건 아무것도 없군요. 미안해요. 앞으로도 이렇게 밖에는 못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나는 당신보다는 내가 먼저, 사라지고 싶어요. 미안해요.
거짓말, 이라고 말한다. 너는 나를 위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게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너를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사랑에 빠졌을 땐 사랑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사랑 따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사흘만에 잊어버리는 꿈이 오히려 더 시간낭비라고 말한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또 주저앉은 거냐고 말한다. 지친다, 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제에 어째서 늘 지치기만 하냐고 말한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차피 생각은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열, 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강박관념, 이라고 말한다. 멍청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충분할 만큼 멍청한 상태라고 말한다. 아니아니, 모두 다 거짓말 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어리광은 이제 금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조금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약하고, 천하며, 거짓되게 자란 것이 나이다. 다시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몰랐을 리가 없다. 너도 아니고, 김은중도 아니고, 축구도 아니다.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모른 척 해온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01. 자주색 니트를 한 벌 샀다. 더운 계절이 가고 나면 붉은 옷을 입어도 이 날씨에 어째서 이렇게 뜨거운 색이냐는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더울 땐 한색을, 추울 땐 난색을 즐겨 입는 모양이지만 나는 사시사철 붉은 계통의 옷을 즐겨 입는다. Redmania를 자청할 만큼 내가 붉은 색을 좋아하는 탓도 있고, 얼굴이 하얗고 검고를 떠나 핏기가 별로 없는 나는 한색을 잘 소화해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이번에도 한 가지 디자인의 여러 색의 옷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붉은 계통의 옷으로 선택한다. 옷걸이에 걸어 옷장 속에 넣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옷장 안이 온통 붉다. 이름에도 오행이 고루고루 들어가지 못하고 불만 잔뜩 들어가 있는 격이라 하더니, 나는 그 불을 식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01. 한달 보름쯤, 매일매일 올리고 다니던 머리를 오랜만에 풀었다. 날이 선선해져서 더 이상은 올림머리를 할 이유가 없어진 탓이었다. 거울 앞에 서니 어느 새 머리카락이 참 많이도 길었다. 미용실을 다녀온 지도 오래 전이라 긴 머리는 꽤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단정해 보이도록 머리카락을 반쯤 모아 묶고 밖으로 나섰다. 햇볕이 따뜻해도 바람은 가을 바람이었다. 타박타박, 거리를 걸으면 군데 군데 가을이 어느 새 곁에 왔다는 흔적이 보였다. 나는 혼자 웃음을 지으면서 생각했다. 여름이 가고 나면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질거라던 말. 가을이 되면 나는 조금 더 즐거워질 거라던 말. 02. 사무실에 들어서니 언제 이렇게 머리가 길었냐며 다들 한 마디씩을 던졌다. 내가 봐도 한달 보름 전과 비교가 안 되는 길이었다...
01. 아직도, 2005년 8월- 이라고 적었다가 지우는 일을 반복한다. 내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이 지나간 시간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02. 늘, 늘, 늘, 검은 강물을 보면 그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은 마음. 누구나, 품고 살만한 흔해빠진 마음. 그런데도 어김없이 울고 싶어지는 마음. 03. 묻고 싶었습니다. 그게 나인가요. 그 사람이 나인가요. 내가 그런 사람이란 말인가요. 그런 말이라도 듣지 않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어요. 그러니까 대답해 보세요. 그게 나인가요. 그 사람이 나인가요. 내가 그런 사람이란, 말인가요.
01. 수학 문제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문제는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같다, 다르다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나는 살면서 내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었던 경험 따위는 없다. 그러니까 이런 내 태도 역시 다른 사람이 갖추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나만, 내 생각 대로 살아가고 있으면 된다. 내 삶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의 몫이다. 02. 인생을 좀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 따위로 타인의 인생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런 것은 확실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 중 하나다. 세상에는 때때로- 단 한 가지의 특징만으로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03. 가을이다. 가까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진주알. 빤히 올려다보면, 다시..
01. 나는 쓸데없이 머리만 굴리고 싶지는 않다. 생각하고 고민해봤자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이다. 7년만이지만, 생각하고 고민한다고 해서 아닌 것이 그런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여 이대로 있겠다는 내 생각이, 좀 난감하고 어이없는 운명론자의 생각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좋다. 02.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태풍이 닥칠 것 같은 날이다. 얕게 흔들리는 창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슴에 설렌다. 태풍이 불어닥쳤으면 좋겠다. 이 저녁에는 어둡고 스산한 바람이 불고, 출근길에는 그 바람이 강풍으로 변해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와하하 소리를 지르며 달리고, 도로가에 세워진 나무의 잎사귀들은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날려댔으면 좋겠다. 한바탕 태풍이 ..
01. 교양이 부족한 사람들은 천박하기 쉽고, 교양이 넘치는 사람들은 역겹기 쉽다. 중요한 것은 교양이 딱 적당할 만큼만 갖춰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교양이 부족해도 천박하지 않고 교양이 넘쳐도 역겹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02. 그럭저럭 괜찮긴 하지만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는 위치와 지식과 배경이다. 당신이 가진 것은 그런 것이다. 그만큼을 가지지 못한 것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대신 다른 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따위 생각할 지혜가 당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런 당신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좀 역겹다. 어쩐지 좀 화가 난다. 03. 9월 4일이다. 아니, 9월 4일이었다. 날짜는 이렇게 지나가는 중이다.
01. 어쩐지 마음이 좀 불안해졌다. 지하철이 들어오는데 술에 취한 아저씨는 자꾸만 노란 선 앞으로 발을 디뎠다. 뒤로 물러서 달라는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지만, 비틀거리는 아저씨에겐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져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방송을 내보내는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다급하고, 점점 더 크고,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지하철의 불빛이 보였다. 순간 그 아저씨를 낚아채 뒤로 물러서게 만든 것은 내 옆에 서있던 젊은 남자였다. 02. 내 앞에서 죽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 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과는 또 다른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저 마음이 멍해져 앞을 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