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아무도 모른다/2005.05 ~ 2005.12 (180)
청춘
하나.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전화 한 통씩 하기. 둘. 이번주 토요일이 약속날짜라고 믿고 있는 K에게 그렇지 않다는 걸 문자로 알려주기. 셋. 아직 병원에 입원해있을 B에게 몸은 좀 괜찮은지 연락해보기. 제발 좀, 인간이면 인간답게 주변의 인간들에 대해 생각 좀 하며 살기.
01. 유흥준의 를 읽고 있다. 오며 가며 지하철 안에서 읽기에 적당한 책은 아니다. 하여 자리를 잡고 집중해서 읽다보면 모른 체 해왔던 바람이 자꾸만 마음을 흔든다. 주기적인 열병처럼,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한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 이 자리에도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견뎌내다간 미쳐버릴 것이다. 책을 덮고 무심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땅끝을 밟으러 가고 싶다. 02. 왜 K가 내게 그렇게 물었는지 모르겠다는 건 진심이다. K의 물음에 대한 답을 나 스스로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 역시 진심이다. 하지만, 희미하게는 알고 있다. 어슴푸레하게는 알고 있다. 단지 그 정도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뿐이다. 03. 힘을 내야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
...믿을 수 없게도, 진짜 이겨버렸다. 다섯 경기 연속 한 골도 못 넣었던 그 어리버리 멍청한 바보등신들이, 아픈 다리 절뚝이면서 달리고 피가 난 이마를 동여메고도 헤딩하며 내 앞에서 무려 두 골이나 넣었다. 뒤돌아서 패스하는 것 하나 못하는 줄 알았던 구제불능 브라질 놈이 세상에서 세번째로 멋진 스트라이커가 되어 짠 하고 나타났고, 작고 비쩍 마른 데다 그저 열심히 뛰는 것 말고는 볼 만한 게 하나도 없던 서른살 미더필더가 맨유의 13번 여드름 청년보다 더 멋지고 더 훌륭한 모습으로 훨훨 날아다녔다. 그깟 다섯 경기 승리 좀 못하면 어때. 그깟 다섯 경기 골 좀 못 넣으면 어때. 인생, 참는 자에게 복이 오고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고-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이 날의 이 기분, 꼭 기..
어차피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지. 오늘은 그만 다 잊고, 즐거울 오후만 생각할 거야. 승리할거야. 이번엔 그럴 거야. 그 믿음만 가지고 잠들어서 그 믿음만 가진 채로 깨어날거야. 난 오늘은, 반드시 즐거울 거야.
오랜만에 노래를 들으면서 누워있다. 노래 가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제는 사춘기 소녀처럼 살지 말자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유행가 가사를 되씹고 있노라면 아직도 내가 서른을 눈 앞에 둔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타인의 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두두두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즐겁지 못한 생각 중에도 멜로디가 흥겨워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어 본다. 이 노래도 오랜만이다. 신해철의 목소리도 오랜만이다. 좋구나. 이 노래.
01. K의 많은 괜찮은 점들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점은, K는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든 그렇지 않은 이야기든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무척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들어준다는 점이다. K는 말수가 적은 편이고 때문에 같이 있는 동안에는 이것저것 지껄이기 좋아하는 내가 주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래도 그 시간이 싫지 않은 건, K가 내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냥 덤덤, 무덤덤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K에게서 처음 매력을 느낀 건 아마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K의 표정을 발견했을 때일 것이다. 02. K는 생각과 말이 모두 도덕적이다. 그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점이고 나는 K의 그런 면들이 조금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런 K와 나는 그다..
요즘은 불을 켜둔 채 잠을 잔다. 물론 난, 불을 켜둔 채로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때문에 요즘은 늘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까지 꼬박 머리가 아픈 것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불을 켜둔 채 잠이 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 난,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어두운 곳에서 잠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나는 밝은 곳에서 잠드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매일 저녁 깨닫는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어두운 곳에서 잠을 잘 수 있는 평화보다도 어두운 곳에서 잠을 잘 때 만나는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더 간절한 것이다. 생에는 이런 일들이 수없이 많다. 원하는 것은 늘 하나가 아니므로, 우선순위를 생각해야 한다. 첫번째것만 이룰 수 있다면, 두번째와 세번..
01. 하고 싶은 것, 이 뭔지 대충 알겠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좋겠다, 라고 말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나의 말에조차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게 되었을까- 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02. 아무도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진심과 진실. 끊임없이 생각해왔고 깜빡 건망증에라도 걸린 듯 굴지만 늘 잊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03. 괴로움에 대해서는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얼마나 괴로울 것이냐. 어떻게 괴로울 것이냐. 무엇 때문에 괴로울 것이냐. 두번째와 세번째에 대해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사실 첫번째 문제는 삶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 아닐까. 어차피 어떤 식으로 살아내든 괴롭지 않은 삶이란 없을 테니, 어떻게 괴로울 지 무엇 때문에 괴로울 지만 선택한다면 ..
오래 샤워를 한다. 널부러진 옷들을 옷걸이 걸어 넣고, 매일 아침이면 너저분해지는 방을 청소기를 돌려 치워놓는다. 속옷 몇 가지와 오늘 신은 스타킹을 빨아 널고 내일 입을 구겨진 치마를 다림질해 놓는다.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여전히 방은 추워 치마 대신 긴 바지로 갈아 입고, 두꺼운 후드티를 덧입는다. muse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한 시간 사이 몰라보게 깨끗해진 방에 누워 내 삶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 발자국도, 단 반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있는 나의 현실에 대하여- 말이다. 매일을, 새로운 사람처럼 눈을 뜨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낸다는 것은 이렇게 경이로우며 이렇게 피곤하다. 열정이나 에너지라는 것이 나라는 인간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 를 떠..
나는 왜 화가 난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
요며칠, 계속 그랬어. 넝쿨 같은 거야. 왜 잭의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서 엉킨 넝쿨 말이야. 그 넝쿨이 하늘을 찌를 듯 자라난 것처럼 걱정꺼리들도 그랬어. 난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가위를 들고 나타나 이 넝쿨들을 싹둑 싹둑 잘라주길 바랬던 거지. 하지만 질기고 질겨서 잘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 게다가 가위를 든 것도 나여야만 하지. 나는제각각,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이 줄기를 자르면 저 줄기가 금세 자라. 난 또 저 줄기를 자르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죽도록 싫어. 차라리 넝쿨이 자라나고 있다는 걸 모른 체 하고 싶어서 눈을 감지. 이것들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은 마음에 죽음 같은 쓸쓸함을 남길 거야. 난 어떻게도 할 수가 없..
01. 사람들은 참 제멋대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나를 미워하든, 나 때문에 상처받았든, 나에게 상처받았든, 나를 용서할 수 없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나는 그저 나에 대해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뿐이다. 02.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존재를 필요이상으로 커다랗게 상상한다. 물론 삶의 절반은 착각과 오해로 점철되는 것이니 사람들의 그러한 습관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본능적으로 어리석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잠에 들어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 인간은 나약하다. 내 종족이 지닌 이 나약함 만큼 나를 절망하게 했던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03. 벌레의 이빨에 대해서 생각한다. 먹이를 갉아서 제 입 속으로 꾸역..
그건 분명 울음소리였다. 기억하건대 그것은 분명히, 내가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울음 소리였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를 다시 한번 불러보는 것 뿐이었다. 무기력했다. 나는 엄마에게서 너무 멀리 있었다. 엄마는 불안해했다. 울고 싶었을 테지만, 아빠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보세요, 라고- 울음 끝에 뭉개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살아서 이렇게 울고 있는 엄마의 전화를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다. 엄마가 내게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철이 든 이후, 나도 엄마 앞에서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그랬다. 좋은 딸이 되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엄마가 늘 가여웠다. 하..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화가 나려고 한다. 나를 시험하려는 것도, 나를 시험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도.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이런 식이라면 난 또 도망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솔직함만이 방법이다.
01. 나는 있잖아. 한번쯤은, 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어떠니? 한번쯤은, 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 내가 여전히 사는 일에 의심을 품는다는 게 싫을 때가 있어. 그래서 너는 어떤지. 너는 그런 의심 없이 잘 살고 있는지.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거야. 니가 괜찮다고 하면 나는 어쩐지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아. 02. 그래, 지금도 어려워.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어려워. 노력까지 해야한다는 것은 좀 우습잖아. 좀 되는 대로, 이면 안 되는 건가.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노력까지 해야한다는 건, 좀 쓸쓸하지 않은가. 그래서 아무런 노력도 안 해서, 너를 잃었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니. 그렇지만 노력까지 해서 너를 잃지 않았다한들, 내가 행복했을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복했..
01.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땐 사실 고민을 하게 된다. 요즘 들어선 더더욱 한번 든 잠을 깨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 상태를 이기고 TV를 켜기란 쉽지 않다. 이대로 그냥 자버릴까. 나중에 재방송이라도 보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다운을 받아 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 마음은 점점 더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가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사실 홍명보나 김은중이 아닌 이상, 그것은 라울이라 할지라도 몰려오는 졸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란 쉽지가 않다. 02. 하여 그렇게 놓치는 경기들이 꽤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잠에 약한 인간인 탓이다. 하지만 오늘 새벽에는, 말끔히 잠을 이겨내기 위하여 고민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당장 욕실로 달려가 양치를 해버리는 것으로 라울에게 ..
난 귀걸이를 좋아한다. 애용하는 유일한 악세사리기도 하고, 내 돈 주고 사들이는 유일한 악세사리기도 하다. 물론 사는 만큼 또 많이 잃어버리기 때문에 자주 사들인다고 해서 귀걸이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귀걸이의 수가 남들보다 많은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취향, 이라는 것이 있는데 난 옷도 그렇고 모자나 신발도 그렇고 귀걸이 역시- 화려하고 특이한 것이 좋다. 이런 것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웃기진 않을까, 너무 눈에 띄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성격인 것이 다행스러운 셈이다. 하여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귀걸이는 선물 받은 것 외엔 없다. 내 귀걸이는 죄다 치렁치렁하거나, 꽃이 피어 있거나, 나비가 날아다니거나, 크다. 세상엔 많은 돈을 들이지..
01. 멍하니 앉아있고는 한다. 생각해보면 믿기지 않는 행운들이다. 그 날은 비 내리는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는 친구의 차 속에서, 어쩌면 니가 벌써 그 자리를 떴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다. 사실은 난, 니가 그 자리를 떴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너를 꼭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을 하면서 너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내렸을 때, 내 발이 그 질퍽한 땅을 찰팍 하고 밟았을 때, 우산을 받쳐들고 너에게로 걸어갈 때, 너는 끼익- 하고 유리문을 열어보인다. [들어오세요.] [...] [혼자왔어요?] 나는 우산을 접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나는 네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이 두 마디는 평생 내 기억 속의 네 뒤..
누가 먼저 지치게 될까? 누가, 누구에 의해서?
어느 날 문득, 소년이 다 자란 남자처럼 굴 때- 나는 그 소년이 싫어졌다. 마음껏 어여뻐한 후에 소년이 자라나는 순간 정을 떼버리는 것은 물론 나쁜 일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스레, 어린아이들이 싫었다. 밑으로 하나 있는 남동생이 나보다 꼭 10년 후에 태어났고 그 동생을 업고 안고 어울리지도 않는 누나 노릇 하면서 사느라 일찌감치 진저리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결혼도 그렇거니와 내 아이를 가지는 일 같은 것은 살아서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에 하나였다. 괴롭고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면, 나는 꼭 임신이나 출산에 관한 꿈을 꿨다. 내가 가장 괴로운 상황,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 아이가 생기는 상황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꼭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던 내가 이..